이론과 실천 76

정치적 중립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가 남의 지갑을 슬쩍 하다가 건너편에 있는 한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소매치기는 이 목격자를 향해 손에 든 면도칼을 보여주며 입 조심하라는 신호를 건넨다. 목격자는 자신의 안전을 지킬 것인지 정의를 지킬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상황에서 목격자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이 둘 밖에 없다. 그것은 간단히, 범인을 도울 것인지 피해자를 도울 것인지로 요약되는 입장이다. 명백히 이 두 입장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며칠 전에 전국 법관대표회의에서 검찰총장의 징계사유인 ‘판사 사찰’ 의혹이 안건으로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다. 그 이유인즉, 법관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판사 사찰은 중대한 범죄다. 다름 아닌 법관의 정치적 중립 혹은 사법적 소신을 위협하는..

이론과 실천 2021.01.27

절대시간

우리 집 둘째가 수능 공부할 때 봤던 ‘생활과 윤리’ 문제집이다. 간단히 ‘생윤’으로 통칭되는 이 교과는 철학에 가깝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철학을 어떻게 공부하며 철학적 이슈가 수능시험에서 어떻게 출제되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문제집을 쭉 넘기는데 한 문제가 눈길을 끌었다. 첫 문장을 읽으면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구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이 부분은 에릭 프롬의 심오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 난해한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내가 윤리 교사라면 이 한 문제 풀이에만 한 시간 수업을 다 보낼 것이고, 또 충분히 그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문장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부터 쉽지 않다. ‘수동적 감정’이란..

이론과 실천 2021.01.27

우연과 필연

경북은 땅이 넓고 험준해서 다니기가 힘든 편인데 최근에는 산간 오지에도 4차선 도로가 뚫려 교통이 점점 편리해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새옹지마인지라, 복(福)과 화(禍)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돌아가기 마련이다. 북동부에 위치한 어느 산간 지역에 주민들의 오랜 숙원인 4차선 도로가 개통되었는데, 역설적으로 이 편리한 길이 생기면서 이 지역에 전례 없는 우환이 생겨났다. 이 도로가 강원도 정선으로 연결되는데, 지역민들 가운데 정선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삶의 행불행이 개인의 자질에 의해 좌우되는지 사회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지에 관한 좋은 토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문제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그 진실이 보다 명쾌하게 규명된다...

이론과 실천 2021.01.27

People

people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1)사람들 2)국민 3)민중 4)인민 등이 있다. 이 다양한 용어들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며 그 용어가 풍기는 뉘앙스 또한 천양지차를 보인다. 박정희 전두환 때 ‘인민’은 물론 ‘민중’이란 말조차 불온시 되었다. 그 관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인민’이란 용어는 많은 이들이 사용을 자제해오고 있다. South Korea’s main opposition party changes its name to People Power Party in a move to the left. 한국의 주요 야당이 좌파로 이동하면서 이름을 인민권력당으로 변경 이 나라 주요 야당의 정체성을 아는 우리들에게 이 문장은 너무 낯설게 다가온다. 보수는 보수대로 ‘국민의 힘’을 ‘인민의 권력’으로 옮기는 것..

이론과 실천 2021.01.27

허위는 진리의 시금석

지금까지 ‘변증법’이란 제목이 들어있는 한글판 책은 다 구입한 것으로 안다. 그 중 아주 어려운 몇 권의 책을 빼곤 다 읽었는데, 최근 구입한 이 책도 그 목록 속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입문]. ‘입문’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너무 어렵다. 그래도 아도르노의 다른 책에 비해 좀 쉬운 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그나마 번역이 정말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다행이다. (역자는 내가 존경하는 홍승용 선생님 / 현대사상연구소장) 이 어려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는 엄두도 못 내고 제목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을 선별하여 읽고 있다. 그 중 무릎을 치게 되는 한 문장을 만나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허위는 그 자체와 진리의 시금석이다 falsum index sui et veri. 아도르노는 “..

이론과 실천 2020.09.17

본질주의의 허구

지난 글에서 똑같은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집단의 외연을 확장하여 ‘구조’ 혹은 ‘시스템’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실은 학교라는 큰 집단 속에 있고 학교는 사회 혹은 교육제도라는 시스템 속에서 기능한다. 선한 구조 속에서는 선한 인성이 형성되고 악한 구조 속에서는 악한 인성이 형성된다. 그 예로 지난 글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적인 교직원이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작은 학교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풍경을 소개했다. 개인이 속한 구조의 단위가 크면 클수록 구조로부터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교실 차원에서 “더불어 살아가기”를 실천해도 학교 차원에서 경쟁을 강조하면 교실에서 추구한 공동체적 삶이 손상되기 마련이다. 또한 아무리 선한 학교..

이론과 실천 2020.09.17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방학한 지 1주일이 지났다. 3월부터 석 달간 온라인으로 만나고 6.3.(수)에 등교개학을 했으니 아이들과 직접 부대낀 것은 두 달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올해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2017년부터 4년 연속으로 3학년을 맡고 있다. 전임교(도량초)와 현임교에서 각각 2년씩 맡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홀수 해에는 너무 힘들었고 짝수 해에는 너무 행복한 것으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전자의 아이들이 나쁘고 후자의 아이들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초3 아이들은 모두 순박하다. 똑같은 학교와 똑같은 담임교사에 똑같은 3학년인데 홀짝으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원인이 뭘까 생각해본다. 전문용어로, 사회경제적 수준(socio-economic status, SES)..

이론과 실천 2020.09.17

과학적 개념 vs 자생적 개념

우리의 사고가 발달하는 것은 개념을 통해서이다. 개념은 책이나 여러 가지 지적 경로를 통해 획득되지만, 개인이 나름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형성해가는 경우도 많다. 비고츠키는 이렇게 형성된 개념을 ‘자생적 개념’라 일컬었다. (원어로는 ‘spontaneous concept’인데 흔히 ‘일상적 개념’으로 옮기곤 한다.) 자생적 개념은 스스로 길어 올린 지식체계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 개념을 스스로 형성하기까지 나름 정교한 논리와 사고를 작동시켰기에 그 과정에서 내면에 일정한 정신의 근육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생적 개념은 어떤 객관적인 팩트에 근거하지 않고 주관적 사고에 의거하여 자의적으로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 부분 오류를 내포할 위험이 있다. 자생적 개념의 이러한 한계에 대비되는 개념..

이론과 실천 2020.09.17

특정 상표명이 보통명사로 잘못 쓰이는 몇몇 사례

방학이 시작되면 내가 맨 먼저 들르는 곳이 대구에 있는 악기사다. 이 동네는 내가 태어났고 지금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곳이기에 자주 간다. 악기사에 전시된 기타 하나가 눈길을 끌어 사진을 찍었다. 메이커 이름이 오베이션(Ovation)이라 적혀 있는데, 지금까지 나는 ‘오베이션’이 이렇게 생긴 기타를 통칭하는 명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특정 기타 상표명인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아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특정 상표명이 보통명사로 잘못 쓰이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 # 바바리 ‘바바리 맨’이라 할 때 ‘바바리’는 명품 의류 메이커 ‘버버리Burberry’에서 왔다. 버버리는 영국 메이커인데, 영국 날씨는 비가 자주 내려서 사람들이 우산 대신 입는 레인코트를 버버리 회사에서 만..

이론과 실천 2020.09.17

행동주의심리학

일반인들에게 ‘행동주의behaviorism’라는 말은 낯선 기표일 수 있지만, 교육학을 공부한 교사들에게는 익숙한 용어다. 교사든 일반 학도들이든 대체로 행동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품고 있는데 이것이 거의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성에 문제의식을 품는다. S-R(자극-반응)로 표상되는 행동주의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품는 자체는 정당하다. 복잡 오묘한 인간 존재가 동물과 똑같이 “외부 자극에 그대로 반응한다”는 사고는 팩트를 떠나 어떤 불경(不敬)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행동주의의 오류는 인간을 동물과 같이 취급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본 것에 있다. 인간 질병 유전자의 75%가 초파리에게서 관찰된다고 한다. 각종 암은 물론 알츠하이머나 자폐 같은 정신 이상증세도 인..

이론과 실천 2020.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