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41

장승초

전북 장승초에 다녀왔다. 6학급의 소규모학교인 것은 알았는데 방금 홈페이지에 들어가 학교 현황을 보니 전교생 수가 89명이다. 보통 시골에서 6학급 규모의 학교는 보기 드물다. 대부분 4~5학급이고 전교생 수도 30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소규모학교에서 한 반에 학생 수가 20명씩이나 되면 교사가 엄청 힘들다. 도시 학교의 경우보다 학급당 학생 수는 적지만 교사 업무가 엄청 많기 때문이다. 즉, 교사 입장에서는 그나마 학생 수가 적은 것이 시골 학교에 근무하는 낙이라 할 수 있는데 장승초는 이런 메리트도 없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학교에 근무하기 위해 순번을 기다리는 교사가 많다는 것이다. 이 뜻밖의 현상 속에서 우리 교육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무릇 교육은 결국 교사의 손끝에서 이루어..

산타할아버지

10년 전쯤 4학년 담임할 때,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는 것을 알고서 깜짝 놀랐다. 그 뒤로 3학년 아이들에게도 산타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묻는데, 매번 긍정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이 반반으로 나뉜다. 올해는 국어 수업에서 주장하는 글 단원을 배울 때 이 문제를 다뤄 의견을 물어봤다. 주장을 내세울 때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하면서,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각각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보자 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 학생-1) 산타가 있기 때문에 선물을 받습니다. 산타 마을도 있는데 산타가 없겠어요? 산타는 굴뚝으로만 들어온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못 들어온다고 생각..

바보같은 존재조건이 극악무도한 청소년의 비행의식을 부추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한 문장인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는 분들 가운데도 이 명제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경우를 자주 봤다. 유물론의 진수가 담긴 이 명제는 사실 상식 그 자체로서 철학적 입장과 무관하게 모든 존재 방식에 적용되는 철칙이다. 이를테면, 자동차보험회사에서 피보험자의 연령이나 결혼 여부에 따라 보험수가를 달리 매기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피 끓은 청년과 원숙한 중년, 가족이 딸린 사람과 자유로운 독신은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 운전’의 의식이 다른 것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더욱 실감나는 예로 요즘 이 나라 중학생들의 극악무도한 비행 행각을 생각해보자. 30여 년 초등교사로 지내고 있는 내 경험으로 초등 아이들은 내 초임 시절인 80년대 말보..

멀리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나는 ‘잔머리’가 발달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언제 어디서든 늘 잔머리를 굴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습성이 있었다. 골프 연습을 하면서도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무슨 운동이든 몸과 함께 머리를 쓰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특히 골프는 머리 쓰기가 많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공을 멀리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머리를 많이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을 멀리 보내는 것보다 똑바로 보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골프 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이 자명한 이치를 우리 일상과 연결지을 때 꽤 의미심장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된다. 이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 골프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그림으로 설명을 곁들일 필요를 느낀다. 구글에서 적..

애국가와 애국심

어제 우리 학년은 온라인 수업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는 바쁘다. 긴급히 논의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전에 학년 선생님들끼리 모여 회의를 했다. 회의 도중에 옆동 건물에서 아이들이 애국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송으로 개학식을 하는 것이었다(일부 학년은 어제 개학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애국가를 너무 무성의하게 부르는 것이 나의 심기를 자극하여 잠시 생각에 잠겼다. 3학년 아이들은 애국가를 부를 때 성실하게 부른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수록 더 나아져야 하는데 왜 더 못해지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국영수 실력이나 음악 체육 기능은 교육을 받을수록 더 나아지는 게 분명하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수록 더 나빠지는 것은 ..

우리들의 일그러진 아이돌

연예인. 한자어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 시절엔 연예인이 ‘연애인’인 줄 알았다. 어린 아이는 새로운 낱말을 만날 때 앞뒤 문맥이나 대상의 특징적 측면을 근거로 뜻을 유추해서 개념을 정립해간다. 나는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이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 즉 팬들이 연애 감정(戀心)을 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연애인’인 줄 알았다. 실제로 소년소녀들은 연예인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다. 자기 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도 슬퍼할 줄 모르는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펑펑 흘리고 꽃다발을 사들고 병원 앞에서 다른 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다. 사실 스타들이나 기획사가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으는 기제가 이런 것이다. 팬들이 스타들을 향해 품는 연..

왜 공부 못하는 청춘은 자존감이 낮아지는가?

방학 내내 도서관 열람실에서 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더운 여름에 도서관보다 더 좋은 피서지도 없다. 적막이 감도는 조용한 열람실에선 책장 넘기는 소리조차 민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내 앞자리 청년의 이어폰에서 소음이 새 나와 신경이 거슬린다. (내가 좀 민감한 편이이서 이런 걸 잘 못 견딘다 ㅜ ) 내 불편한 의사를 전하려 다가갔더니 맙소사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을 할 것 같으면 도서관에 뭐하러 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젊은 분들 가운데 이런 사람 한둘이 아니다. 그들에게 게임은 숨 쉬고 물 마시는 것처럼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공부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자기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밖에 나가서 친구랑 술 마시거나 ..

이기는 것보다 잘 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하계 올림픽이 2주간의 대장정을 마쳐 간다. 사상 초유의 코로나 사태로 개최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일본 정부가 절박한 의지로 강행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살인적인 무더위와 태풍 예보로 난항이 예상되었음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 되는 듯하여 다행이다. 무관중으로 진행되어 예의 축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들이 발군의 실력을 펼치는 스포츠 본연의 감동은 변함없었다. 탁월한 운동 기능도 그러하지만 상대 선수를 배려하는 인간미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기 기량을 유감없이 펼친 것에 의의를 두는 스포츠맨십은 보는 이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고 존경심을 자아냈다. 특히 여느 대회와 달리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한국 선수들이 보여준 태도에 뜨거운 갈채를..

존재와 의식

2014년 1월에 북유럽 3개국(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을 다녀왔다. 관광이 목적이 아닌 학교 탐방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학교도 신선했지만 우리와 다른 사회의 모습들에 적잖이 놀랐다. 그 신선한 충격 중의 하나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표정이 우리와 달리 밝다는 것이었다. 북유럽 사람들의 표정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체로 어두운 편인데 그건 날씨와 관계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내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는 것은, 우리와 달리 팍팍한 삶에 지쳐 피폐한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다. 작업복 차림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우리가 흔히 ‘노가다’라 일컫는 건설 노동자의 얼굴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이 같은 ..

삐삐

3학년 사회 시간에 요즘 배우는 공부 주제가 “옛날과 오늘날의 통신수단"이다. 이 단원 마지막 페이지에 ‘쉬어가기’ 코너로 삐삐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요즘 교과서는 참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내겐 흥미 있는 이 이야기가 아이들 입장에선 이해가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점이다. 그래서,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또 슬쩍 지나가라고 있는 이 쉬어가기 코너에서 1시간 내내 설명을 했다. 삐삐가 한창 보급되던 시기이니 아마 1990년대 중반쯤의 이야기일 것 같다. 신문 기사를 재구성해서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데, 헤드라인에서 ‘열풍’, ‘이색 풍경’이란 어려운 낱말을 풀이해주는 데만 몇 분이 걸렸다. 헤드라인의 말은 어렵지만, 속 내용은 재미있게 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삐삐라는 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