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우리들의 일그러진 아이돌

리틀윙 2021. 9. 9. 07:29

연예인.

한자어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 시절엔 연예인이 ‘연애인’인 줄 알았다. 어린 아이는 새로운 낱말을 만날 때 앞뒤 문맥이나 대상의 특징적 측면을 근거로 뜻을 유추해서 개념을 정립해간다. 나는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이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 즉 팬들이 연애 감정(戀心)을 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연애인’인 줄 알았다.

 

실제로 소년소녀들은 연예인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다. 자기 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도 슬퍼할 줄 모르는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펑펑 흘리고 꽃다발을 사들고 병원 앞에서 다른 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다. 사실 스타들이나 기획사가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으는 기제가 이런 것이다. 팬들이 스타들을 향해 품는 연애 감정이 이들 부의 원천인 것이다. 그래서 기획사에서는 스타를 향한 팬들의 연애 감정이 유지되도록 스캔들을 극도로 조심한다.

 

나도 소시 때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이 있었다. 고백컨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누님들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나 돈 많은 사람들에게 놀아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어떤 박탈감이나 분노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사회 모순에 대한 나의 최초 감정이 여기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정신세계 속에 고급 어휘들이 자리하기 시작한 어느 시점에 연애인이 연예인演藝人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 애’자가 예술 할 때의 ‘예’로 바뀌니 연예인이 달리 보였다. 저급한 사춘기적 감상의 자리에 어떤 품위있는 가치관이 들어서면서, 연예인을 묘사하는 수식어가 ‘섹시하다’에서 ‘멋있다’로 바뀌었다. 이전에 은밀한 백일몽의 대상으로 존재한 스타가 어느덧 존경의 대상으로 내 삶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안성기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우상이다.

 

소시 때 ‘연애인’을 향해서는 성적인 문제로 그들에게 실망을 했다면, 연예인이 예술적 가치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품은 뒤로는 금전적인 문제로 이들에게 실망을 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돈을 너무 밝힌다는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70대 남자 배우가 자기보다 마흔 가까이 젊은 여성과 혼외 관계를 맺었다(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는 기사보다 아무개 연예인이 서울 강남에 수백 억대의 빌딩을 구입했다는 기사에 치를 떤다.

 

대중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선망을 한 몸에 안고 살아가기에 연예인에겐 고도의 사회적 책무성이 요구된다. 목자에게 신앙이 교육자에게 교육혼이 생명이듯이, 예술가의 자질을 대변하는 것은 예술혼이다. 그런데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울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동네에서 아무개 연예인이 200억짜리 빌딩을 구입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연예인이 그보다 비싼 값에 어떤 건물을 구입했다는 뉴스가 들려오는 것은 예술혼과 너무 거리가 멀다.

 

도둑질해서 번 돈이 아니니 자기 마음대로 빌딩을 구입하고 재테크 차원에서 더 많은 재산 증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그저 졸부일 뿐 예술가는 아니다. 영화는 인간 삶의 리얼리티를 카메라에 담는 작업이고 배우는 세파에 찌든 대중의 희노애락을 연기를 통해 대변하는 사명을 띤다. 주인공을 맡은 이는 정의의 화신이 되어 대중의 눈물과 한숨을 달래주고 악역을 맡은 이는 찌든 세상의 모순을 리얼하게 들춰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코로나 시국에 극도의 궁핍한 삶을 전전하다가 쪽방에서 자동차 안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의 소식과 함께 모 연예인이 수백 억대 빌딩을 구입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씁쓸한 상념에 젖게 된다.

 

스타는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인 점에서 일종의 교육자다. 연예인이 공인(公人)이라 하는 건 이런 뜻이다. 공인이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문제가 될 게 없는 사소한 일로도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음주운전이다. 삼성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박한이는 전날 경기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셨는데 다음날 자기 자녀를 태워 주러 가다가 접촉사고를 냈고 규정에 따라 경찰이 음주 측정을 했는데 기준치가 넘어 그 길로 은퇴 선언을 했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 음주 측정에 걸린 스타가 책임을 통감하며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평생을 몸담아온 구단을 떠나는데, 200억 300억짜리 빌딩이나 오피스텔 구입하는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는 것은 부끄럽지 않는가? 이게 예술가적 마인드와 부합하는가?

 

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부를 좇는 욕심도 어느 정도지 수백 억 빌딩을 무슨 마트에서 물건 쇼핑하듯이 훌쩍 사버리고 몇 년 뒤에 몇 곱절의 가격으로 되파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몰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너무 돈이 많으면 두려울 것 같다. 더구나 대중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스타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것 같다. 200억이 있으면 100억만 갖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쓸 것이다.

 

해외의 스타들 가운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홍콩 영화의 대명사인 주윤발은 자신의 전 재산 8100억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자가용차도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한다. 키아누 리브스는 아무도 모르게 어린이 암환자를 위한 재단을 운영해오는가 하면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여 재정 문제를 겪자 거액의 개런티를 제작진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스타는 죽어서 명성을 남긴다. 수백 억이든 수천 억이든 무덤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간다. 삶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 예술가가 영원토록 대중에게 존경받기 위해서는 돈 욕심을 너무 내지 않길 바란다.

 

더 많이 가질수록 예술가적으로는 덜 존재하게 되며, 자기 삶에서 소외도 더욱 커져간다.

The more you have the less you are and the greater is your alienated life.

 

마르크스의 명문을 살짝 수정해서 인용했다. 이 문장의 백미는 ‘the less you are’인데, 독일어의 sein 동사나 영어의 be 동사는 철학적 맥락에서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다운 삶과 멀어져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alienated’라는 말도 우리 말로 적절히 옮기기 어렵다. 이 낱말의 원뜻은 ‘낯선’의 뜻이다. 영화 ‘에일리언’은 우리 인간에게 낯선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에일리언’은 ‘괴물’로 표상된다.

 

너무 많이 가지면 괴물이 된다. 한때 이땅의 수많은 소년소녀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아이돌 승리의 추락을 보면서 ‘에일리언’이 떠올랐다. 아마도 수천 억을 가졌을 승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갖고 싶었던 것일까?

아, 우리들의 일그러진 아이돌이여!

 

202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