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존재와 의식

리틀윙 2021. 9. 9. 07:24

2014년 1월에 북유럽 3개국(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을 다녀왔다. 관광이 목적이 아닌 학교 탐방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학교도 신선했지만 우리와 다른 사회의 모습들에 적잖이 놀랐다. 그 신선한 충격 중의 하나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표정이 우리와 달리 밝다는 것이었다. 북유럽 사람들의 표정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체로 어두운 편인데 그건 날씨와 관계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내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는 것은, 우리와 달리 팍팍한 삶에 지쳐 피폐한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다. 작업복 차림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우리가 흔히 ‘노가다’라 일컫는 건설 노동자의 얼굴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하는 좋은 예가, 황선준 선생님의 저서 [금발머리 여자, 경상도 남자]에서 볼 수 있다. 경남교육청과 서울교육청에서 연구정보원 원장을 지낸 황 선생님께서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황 선생님이 지도교수와 함께 밖에서 점심을 먹고 대학교 연구실로 들어오는데 마침 그날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런데 건물 청소를 하던 아주머니가 노교수를 향해 쌍욕을 퍼부으면서 “지금 청소하는 게 안 보이냐? 비오는 날엔 밖에서 신발을 털고 들어올 것이지, 청소하는 사람 힘들게 이게 뭐냐?”고 호통을 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청소노동자의 이 같은 태도에 노교수가 “정말 죄송하다”며 저자세로 사과를 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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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 교수인데 어찌도 이렇게 다를까? 최근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노동조합에서 열악한 근무여건에 대해 학교측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자, 학생처장이라는 보직을 맡은 교수가 “한 분의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산 사람들이 너도나도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게 역겹다”는 발언을 했다 한다.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좀 하면 어떤가? 대학교수가 강의실에서 쓰러져 죽을 일은 없다. 망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청소노동자들은 잠재적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이 제 2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현재의 과중한 근로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떻게 ‘피해자 코스프레’인가?

 

교육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야 하고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 집단을 향해 “피해자 코스프레가 역겹다”는 발언은, 악덕 회사 사장이라면 몰라도 교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이 나라에서 최고로 똑똑한 학생들이 모인 대학이니 이들이 훗날 청소노동자가 될 일은 없고 대부분 우리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설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수 밑에서 배운 학생들이 이끄는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암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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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회에서도 처음부터 청소노동자가 대학교수를 향해 쌍욕을 퍼붓고 교수는 저자세로 사과하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사회에서도 청소부들이 낮은 자존감으로 살아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유럽에서 육체노동자들이 지금 높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처럼 죽도록 일하고 급료를 적게 받는 사회에서 저소득 노동자들이 높은 자존감을 지닐 수는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품위는 ‘자본’의 수위에 비례하는 법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만큼 소득을 챙기게 된 것이나 청소노동자가 대학교수와 대등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적 약자들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한쪽에서는 이를 ‘투쟁’이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코스프레’라 일컫는다. 같은 현상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는 것 또한 "존재양식이 의식을 규정하는" 이치로 설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