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삐삐

리틀윙 2021. 9. 9. 07:23

3학년 사회 시간에 요즘 배우는 공부 주제가 “옛날과 오늘날의 통신수단"이다. 이 단원 마지막 페이지에 ‘쉬어가기’ 코너로 삐삐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요즘 교과서는 참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내겐 흥미 있는 이 이야기가 아이들 입장에선 이해가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점이다. 그래서,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또 슬쩍 지나가라고 있는 이 쉬어가기 코너에서 1시간 내내 설명을 했다.

 

 

삐삐가 한창 보급되던 시기이니 아마 1990년대 중반쯤의 이야기일 것 같다. 신문 기사를 재구성해서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데, 헤드라인에서 ‘열풍’, ‘이색 풍경’이란 어려운 낱말을 풀이해주는 데만 몇 분이 걸렸다.

 

헤드라인의 말은 어렵지만, 속 내용은 재미있게 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삐삐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 입장에선 이것이 어떻게 작동되며 왜 필요했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방과후나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왜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 있는지, 공중전화는 또 뭔지?

삐삐를 본 적은 물론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고, 공중전화를 본 적이 있다는 아이는 몇이 있어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아이도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집 전화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를테면, 국어 시간에 친구 집에 전화 걸었을 때 친구 엄마가 받으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화 예법을 설명하면, “친구에게 휴대폰을 바로 하면 되는데, 왜 누구를 바꿔달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삐삐를 받은 사람이 공중전화를 이용해 삐삐화면에 뜬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고, 전화 받은 사람에게 “000-000-0000번으로 호출하신 분 좀 바꿔주세요”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호출자를 찾아 삐삐 소유자에게 전화 수화기를 건네준다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

 

현대인들이 하루 동안에 받는 자극의 양은 중세 사람들이 평생 받는 자극의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어느 책에서 읽은 글인데, 글이 쓰인 시점이 10~20년 전일 것 같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현재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스마트폰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 시간 동안 받는 자극의 양은 중세 사람들이 평생 받는 양의 자극과 맞먹는다.

 

5년 연속으로 초3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4년 전 아이들은 그래도 집 전화에 대한 개념은 갖고 있었다. 우리 집만 해도 4년 전엔 집 전화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엔 초3 아이들 가운데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는 아이는 얼마 안 됐다. 그런데 지금은 100퍼센트 다 갖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수업이 전면 시행된 것이 큰 몫을 했다.

 

내게 삐삐 이야기는 엊그제의 일처럼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건만, 우리 아이들에겐 ‘전설 따라 삼천리’로 들린다. 심지어 4년 전의 초3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는 집 전화 이야기를 올해 아이들은 이해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원시시대 인간 세상의 변화 속도가 지렁이라면 중세 시대는 거북이이고,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전 현대는 경운기, 컴퓨터 이후 스마트폰 이전 시대는 자동차...... 그리고 지금은 광속 시대가 아닌가 싶다.

 

.

 

중세 사람들이 평생 받는 양의 정보를 하루 혹은 한 시간 만에 받게 된 것은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정보 전달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서 개인이 숨을 곳이 없어져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사회 발전이란 차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이 대선 직전에 다스 비리가 폭로되었음에도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선거 시기(2007년말)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박 대선 때와 달리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투명한 세상이다. 그래서 무서운 세상이지만, 정계에 입문할 일이 없는 민초들에겐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 두 번 다시 이명박 같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히는 일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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