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학벌주의가 투영된 기형적 집단의식

리틀윙 2021. 6. 17. 16:05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음에도 국민적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오늘 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는 150명의 시민들이 모였는데, 멀리 강원도에서 버스 타고 오신 분도 계셨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망자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보낸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면부지의 이웃들이 마음을 내서 함께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고인과 유가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하지만 이 비상한 사회현상에 대해 나는 몇 가지 면에서 적잖이 불편한 마음을 떨치기 어렵다. 한 보름 전부터 수차례 이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음을 접었다. 어떤 식이든 나의 글이 현재 하늘이 무너진 듯한 슬픔을 맞고 있는 유가족에게 상처로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기사에서 “아까운 인재” 운운하는 수사를 접하면서 어떤 결기가 발동하여 자판기 앞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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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과 관련하여 현재 흘러가고 있는 모습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문제의식을 품는다.

 

첫째,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이렇다 할 증거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무턱대고 타살로 몰아가고 있는 집단적 분위기가 위험천만해 보인다.

 

남의 귀한 자식을 늦은 시간에 전화로 불러내 같이 술을 마셨는데, 불러낸 친구는 멀쩡하고 불려 나간 자기 자식은 실종에 이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부모 입장에서 자식의 친구를 향해 품는 증오심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불같은 적개심과 죽음의 원인은 별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부친이나 그 지지자 분들은 그저 몇몇 정황 증거만을 갖고서 마치 정민 군의 안타까운 죽음이 친구에 의한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비이성적 태도는 확증편향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건 당일 친구의 미심쩍은 행동 때문에 의혹이 증폭되었는데, 나는 친구의 이런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라 생각한다. 둘이 같이 술을 마셨는데 친구가 실종되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극도로 당황스러운 사태 앞에서 미심쩍지 않게 행동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리라.

 

처음에는 친구가 걱정되고 친구와 친구 부모에게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나, 냉철한 입장에서는 “자기방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의대를 진학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학생이며, 그의 부모 또한 상류층의 인테리이니 이해타산에 밝을 것은 당연하다. 정민 군의 부친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자칫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이분 또한 자기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똑똑한 두 부자(父子)는 아마 "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침묵과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결과적으로, 이것은 헛똑똑이가 되었다. 차라리 어설픈따나 진정성을 보였더라면 사회적 고립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처신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최소한 자기 자식은 살아왔으니 자식 잃은 부모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그저 “방어적” 자세로 일관한 것은 꼴사납기만 하다. 하지만, 이들이 미운 것과 정민 군의 죽음은 별개의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정민 군 측의 공세에 밀려 친구는 현재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향후 이 땅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가기 힘든 상황에 몰려 있다. 이것은 엄연한 “인격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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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 사건 하나가 전 국민적 관심이나 사회적 공감을 독점하는 것이 유감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 사건은 "혈기왕성한 20대 청춘이 밤새도록 고주망태가 되어 술 마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범죄에는 동기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이 사건에서는 그런 게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설령 정민 군 지지자들의 주장대로 타살이라 하더라도, 그 최악의 범죄 수준은 "과실치사(그것도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저지른)"가 전부다. 다시 말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슴은 그리 넉넉지 않아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사회적 정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40분마다 한 명씩 목숨을 끊는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과 온정 그리고 분노를 품어야 할 대상은 천지에 늘려 있는데, 어느 한 가지에 국민적 관심이 쏠린다면 다른 곳에서는 무관심과 소외가 야기된다.

 

한 예로, 비슷한 시기에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비슷한 나이의 청년이 300킬로그램의 철판에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 사건에 묻혀 사회적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똑같은 꽃다운 나이의 죽음인데, 술마시다 비명횡사한 의대생의 죽음은 전 국민이 슬퍼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열심히 일하다 죽은 청년은 개죽음 취급되는,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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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과도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배경이 또 불편하기 그지없다.

 

사고사든 타살이든 밤새 술마시다 죽은 청년의 죽음에 도대체 이렇듯 과도한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모르긴 해도, 그 배경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벌주의가 자리할 것 같다.

 

“아까운 인재가 갔다”

오늘 추모제 관련 기사문에서 접한 문구다.

 

지난해에 우리는 의대생을 늘이고자 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국민들의 생명을 볼모로 의대생들이 집단행동을 해대는 추태를 보며 경악해 마지않았다. 한번 생각해보자.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그들 가운데 “아까운 인재”가 어디 있던가?

 

의대생이 죽으면 “아까운 인재가 간 것”이고, 육체 노동하다 죽은 지잡대 학생의 생명은 아깝지 않은 이 무심한 사회적 시선에 심한 멀미를 느낀다.

 

학벌주의가 투영된 기형적 집단의식에 씁쓸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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