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바보같은 존재조건이 극악무도한 청소년의 비행의식을 부추긴다.

리틀윙 2022. 1. 23. 18:24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한 문장인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는 분들 가운데도 이 명제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경우를 자주 봤다. 유물론의 진수가 담긴 이 명제는 사실 상식 그 자체로서 철학적 입장과 무관하게 모든 존재 방식에 적용되는 철칙이다. 이를테면, 자동차보험회사에서 피보험자의 연령이나 결혼 여부에 따라 보험수가를 달리 매기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피 끓은 청년과 원숙한 중년, 가족이 딸린 사람과 자유로운 독신은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 운전’의 의식이 다른 것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더욱 실감나는 예로 요즘 이 나라 중학생들의 극악무도한 비행 행각을 생각해보자.
 
30여 년 초등교사로 지내고 있는 내 경험으로 초등 아이들은 내 초임 시절인 80년대 말보다 지금 훨씬 더 순진하다. 초등 아이들이 예전보다 더 착한 이유 또한 “존재 양식의 변화”로 설명된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부모가 아이들을 방치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음지의 문화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의 초등학생들의 풍경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반면,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귀하게 키우기 때문에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이 악행을 경험할 일이 없다. 지금 초등의 경우에도 고학년 아이 가운데는 교사의 통제가 안 되는 비행학생이 있긴 하지만, 중학생과 연계되어 “학습된 비행”이지 독자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보다 이런 문제 학생들은 부모의 케어를 못 받는 문제 가정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이치가 그대로 적용된다.
 
초등 아이들은 예전보다 더 착한데 중학생은 왜 이럴까? 중학생들이 대체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보편적인 중학생들이 초등학교 때는 착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악해질 수는 없다. 대부분의 중학생들 또한 엄석대(이문열 소설 속의 주인공)와 그 또래들보다 훨씬 착하다. 극악무도한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들은 극소수에 불과한데 이들의 비행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사람들이 “요즘 아이들 너무 못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극소수의 중학생들은 왜 이리도 막 나가는 것일까? 며칠 전 대구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훈계한 식당 주인을 찾아가 난동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그 중 한 학생은 “우리는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간다”는 말을 하여 세상을 경악케 했다.
 
요즘 비행 중학생들은 자신의 존재조건과 관련한 법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청소년 범죄나 학교폭력 관련 법에 관해 교사들보다 더 잘 안다. 어떤 비행을 저지르고 그 후과에 대한 걱정이 덜컥 생길 때 SNS를 통해 선 경험자들로부터 정보를 공유한 뒤에 교사 앞에서 당당히 맞선다고 한다.
 
이 또한 존재 조건 면에서 요즘 비행청소년들은 엄석대 시절과 달리 ‘정보화’라는 시대적 혜택을 누린 결과에 따른 변화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 중학교 때 노는 애들이 덜 악했던 것은 심성 자체가 그러해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촉법 소년은 사람 죽여도 감빵에 안 간다”는 지식이 공유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그 시절 꼴통들은 학생주임 교사가 앉혀 놓고 사실관계가 맞지도 않은 법리를 들먹이며 겁을 주면, “아이고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번만 봐주십시오” 하며 꼬리를 내리지만 요즘 아이들은 눈도 깜짝 안 하며 되레 선생을 가르치려 든다.
 
요즘 아이들이 막 나가게 된 결정적인 존재조건의 변화는 중학교 의무교육이 법제화되면서 퇴학이 없어진 것과 관계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심각한 비행을 일삼는 학생은 학교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고 또 일벌백계의 효과를 통해 잠재적 일탈자들의 비행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비행을 저질러도 나는 잘리지 않는다”는 굳건한 믿음 하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청소년들의 악행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있다.
 
온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 교육자의 도리임을 생각할 때 위의 언설이 교육적으로 온당하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는 청소년의 비행 수위는 ‘길 잃은 양’이라는 은유법을 무색케 한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훈계하는 어른을 향해 “우리는 사람 죽여도 감옥 안 간다”며 난동을 피우는 아이는 양이 아니라 악마다.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에 대한 신념은 멀쩡한 아이를 악마로 만들어가는 비합리적인 존재조건을 혁파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지금 중학교에서는 아무리 못 돼먹은 짓을 해도 퇴학을 못 시키고 기껏해야 강제 전학을 시킨다. 도시 학교에서 극악무도한 악행을 일삼던 길 잃은 양이 시골의 작은 학교로 전학 온 뒤로 온전한 양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학교에서 교사가 보는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기에 “학교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타일렀더니 교문 밖에 서서 “그럼 여기서 피우면 되는 거죠?”라고 한다. 1학년 후배 아이가 자기 뒷담화를 한다고 격분해서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ㅅㅂ, 선생들이 애새끼들 교육을 어떻게 시켜서 이러냐?”고 온 학교가 떠나가도록 고함질러댄다. 이런 아이에게 교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손이라도 댄다면 폰을 꺼내들고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맞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학생이 교사에게 맞으면 학교폭력이 성립한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릴 때 교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곳에서 무슨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온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의 피해는 누가 책임지는가?
 
영화 <친구>의 한 장면 “너거 아부지 뭐 하시노?”에서 보듯 우리 학창시절에는 선생들이 아이들을 너무 학대했다. 비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시험 점수 내려갔다는 이유로 엉덩이에 진물이 나도록 밀대자루로 두들겨 맞았고 그래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는 ‘학생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지금 학생인권이 강조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권 강조와 더불어 교권이 실종되어 비행 학생들의 준동에 선량한 대다수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도 교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런 곳은 학교가 아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우리는 사람 죽여도 감옥에 안 간다”는 망상을 품는 것은 이 아이들이 악마여서가 아니라 관련법이 비합리적이어서이다. 바보 같은 존재조건이 극악무도한 청소년의 비행의식을 부추기는 것이다. 망가져가는 교육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촉법소년법이나 학생비행 관련 법규를 개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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