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절대시간

리틀윙 2021. 1. 27. 10:47

 

우리 집 둘째가 수능 공부할 때 봤던 ‘생활과 윤리’ 문제집이다. 간단히 ‘생윤’으로 통칭되는 이 교과는 철학에 가깝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철학을 어떻게 공부하며 철학적 이슈가 수능시험에서 어떻게 출제되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문제집을 쭉 넘기는데 한 문제가 눈길을 끌었다. 첫 문장을 읽으면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구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이 부분은 에릭 프롬의 심오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 난해한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내가 윤리 교사라면 이 한 문제 풀이에만 한 시간 수업을 다 보낼 것이고, 또 충분히 그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문장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부터 쉽지 않다. ‘수동적 감정’이란 어떤 것을 말하며 그것이 왜 ‘활동’과 대비를 이루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프롬이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수동(passive, passion)과 능동(active, action) 그리고 활동(activity)을 영어로 풀이하며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나아가,

- 사랑은 받는 것(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주는 것(능동적 활동)이라는 것,

- 남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것, 사랑은 열정(passion)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power)의 문제라는 것,

-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참여)하는 것임을 알기위해 fall in love와 be in love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 등을 설명하고 토론하자면, 한 시간 수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윤리 수업의 목표는 학생들이 지성에 입각한 윤리적 삶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사랑’이란 주제는 그 자체로 각별한 관심의 대상인데, 사랑에 대한 올바른 철학적 관점을 갖기 위한 공부거리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그만이다. 이 중요하고 심오한 정신세계로 학생들을 초대하는 것은 윤리 교사의 마땅한 소임이며, 그 지적 향연(symposium)이 1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프롬의 매력적인 사상을 익힌 학생들은 그가 쓴 다른 책으로 [소유냐 삶이냐] 등의 책에 관심을 품어갈 것이다. 공부라는 인식론적 여정이 본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부하면 수능 등급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교사 입장에서도 이렇게 수업하다가는 학생/학부모들로부터 된서리를 맞기 십상이다. 학생들 입장에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주제에 깊이 파고들기 보다는 폭넓은 지식을 얕게 파는 것이 훨씬 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다한 지식을 요점만 콕콕 찍어서 문제집 풀이 위주로 나가는 공부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이런 공부에서는 학습자의 지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장이 이루어지려면 그 수련 과정에서 최소한의 절대시간이 요구된다. 이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 얻은 앎은 깊이도 없고 또 흥미도 없다. 이 경우, 배우고(學) 때로 익히는(習)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 된다. 이 고통을 견뎌내는 이에겐 고득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학문에 대한 흥미, 공부의 즐거움을 잃는 불행이 수반된다. 이런 결과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니 수능시험은 망국적 재앙에 다름 아니다.

 

생윤 문제집 속에 엄청나게 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도 이 많은 사상가들의 철학을 고교 3년 과정 안에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학생들은 괴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해낸다. 칸트가 시험 쳐도 만점 못 맞을 것 같은 이 시험의 만점자가 수두룩하다 한다. 이렇게 만점 받은 학생들의 정신세계 속에 과연 철학적 지성이 형성되어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빠는 마오쩌둥을 어떻게 생각해? 우리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대학에 들어간 뒤 코로나로 인해 시간을 허비하다가 2학기부터 중국사 수업을 들으며 아이가 마침내 학문에 눈을 떠가는 느낌이다. 수능 끝나고 아이가 내다버린 문제집 분량이 2박스 가까이 되는데, 그 많은 공부를 하는 내내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더랬다.

 

학교교육 과정(過程)에서 고3이라는 시간은 들어내면 좋을 일이다. 학생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면서 가혹한 스트레스만 안기며 공부에 대한 흥미를 상실시키는 악몽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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