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본질주의의 허구

리틀윙 2020. 9. 17. 16:26

지난 글에서 똑같은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집단의 외연을 확장하여 ‘구조’ 혹은 ‘시스템’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실은 학교라는 큰 집단 속에 있고 학교는 사회 혹은 교육제도라는 시스템 속에서 기능한다.

 

선한 구조 속에서는 선한 인성이 형성되고 악한 구조 속에서는 악한 인성이 형성된다. 그 예로 지난 글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적인 교직원이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작은 학교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풍경을 소개했다.

 

개인이 속한 구조의 단위가 크면 클수록 구조로부터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교실 차원에서 “더불어 살아가기”를 실천해도 학교 차원에서 경쟁을 강조하면 교실에서 추구한 공동체적 삶이 손상되기 마련이다. 또한 아무리 선한 학교도 치열한 입시지옥 시스템 속에서는 협력보다는 경쟁을 조장하고, 깊은 사고력을 기르기보다는 암기 위주의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속한 사회 체제가 다르면 다른 인간상이 길러진다. 남한과 북한, 러시아와 미국에서 각각 교육받은 아이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그리고, 같은 체제라도 시대에 따라 개인의 인성이 달리 형성된다. 이른바 세대차이라는 게 이런 인과관계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 꼰대들이 젊은이들더러 이기적이니 예의가 없느니 하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는 또 앞 세대의 어른들 눈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라는 것이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에 “보편적인 인간성”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위대한 사상가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에 천착하여 어떤 이는 인간이 본래 선하다(=성선설)고 하고 어떤 이는 악하다(=성악설)고 했다.

 

성선설/성악설처럼 사물의 본질(essence)에 대해 어떤 규정을 내리는 접근법을 본질주의(essentialism)이라 한다. 철학사에서 본질주의의 원조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는 영원불변한 것이다. 변하는 것은 이데아(본질)가 아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변하는데, 본질주의적 사고는 사물과 세상사에 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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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주의와 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사랑이나 정의라는 낱말과 마찬가지로 ‘본질’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가슴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는 교육의 본질에 배반된다”는 말을 자주 쓴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가 인문학 책에서 ‘본질주의’라는 개념을 접할 때 어떤 호감을 품고서 문맥을 오독할 가능성이 많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본질주의적 사고가 잘못이다.

 

본질이라는 낱말이 지니는 가슴뭉클함 때문에 자칫 본질주의에 매몰될 위험이 있다. 참교육 운동에 투신할 때 내가 존경한 어느 선배는 “나는 ‘~~답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선생은 선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도 멋진 말이라고 호응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본질주의다.

 

‘~답다’는 말의 허구성이 여실이 드러나는 예가 ‘여자답다’는 개념이다. “여자가 여자다워야지!”라는 말 예전에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는데 지금 이 말을 쓰면 한심한 인간 취급받는다. 조선시대에 양반집 규수가 의원에게 진맥을 위해 손목을 내밀고 나서 양심의 가책 끝에 자진하면 관청에서 열녀문을 세워 여성의 절개를 기렸다고 한다. 그게 시대가 추구한 여성의 본질이었다.

 

여성다움에 대한 개념이 변하듯이 선생다움에 대한 개념도 변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시대의 선생과 지금 선생은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