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허위는 진리의 시금석

리틀윙 2020. 9. 17. 16:41

지금까지 ‘변증법’이란 제목이 들어있는 한글판 책은 다 구입한 것으로 안다. 그 중 아주 어려운 몇 권의 책을 빼곤 다 읽었는데, 최근 구입한 이 책도 그 목록 속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입문]. ‘입문’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너무 어렵다. 그래도 아도르노의 다른 책에 비해 좀 쉬운 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그나마 번역이 정말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다행이다. (역자는 내가 존경하는 홍승용 선생님 / 현대사상연구소장)

 

 

이 어려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는 엄두도 못 내고 제목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을 선별하여 읽고 있다. 그 중 무릎을 치게 되는 한 문장을 만나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허위는 그 자체와 진리의 시금석이다 falsum index sui et veri.

 

아도르노는 “변증법의 진리 개념이 부정적 진리 개념”이라 말한다. 아도르노는 “진리는 그 자체와 허위의 시금석이다verum index sui et falsi”라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되받아쳐 “허위는 그 자체와 진리의 시금석이다”라는 말로 이 개념을 설명한다. 내가 이 문장을 번역한다면, “허위는 자신과 진리를 가르는 기준이다”로 옮기겠다.

 

허위는 진리의 시금석이다!

 

아도르노의 천재적인 기지가 번득이는 이 한 문장을 머릿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이나 가치체계에 대해 접근할 때 ‘정공법’(스피노자 식)보다는 우회적으로(아도르노 식)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명제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1]

이 책의 주제인 ‘변증법’이라는 개념에 대한 접근법이 그러하다. 변증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면 변증법이 아닌 것부터 먼저 인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변증법은 이분법적 사고(=형이상학적 사고)와 대립적인 인식론이며, 양시론적 사고와도 거리가 멀다. 이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변증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사람이다. 반면, ‘변증법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천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변증법은 정반합이다”는 정도로 자문자답하는 데 그친다. 알고 보면, 정반합은 변증법의 정수(essence)와 별 관계가 없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기 러시아의 대문호 체르니셰프스키의 책 제목이지만 이를 패러디한 레닌의 책 제목으로 유명한 이 문장은 86세대 운동권의 영원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투사들의 공과(功過) 혹은 우리 운동사의 흥망성쇠가 이 문장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실로 얼음판 위에 지핀 장작불처럼 무모하지만 뜨거운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문민정부도 촛불혁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력의 원천은 인간해방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스스로 정립한 정언명령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진보정치(정의당?)나 진보운동이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를테면 운동의 원칙과 명분을 중시할 뿐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나는 우리 운동 세력이 예의 활기와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에 대한 뼈를 깎는 성찰이 안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밖에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당면한 어떤 가치를 좇음에 있어 개인이 고민해야 할 것도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교사가 학생들을 위해, 교장이 교직원을 위해, 부모가 자식을 위해, 연애의 주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한 문장을 가슴 깊숙이 품어두자.

허위는 자신과 진리를 가르는 기준이다 falsum index sui et veri.

 

.

 

덧붙임)

라틴어까지 기억하면 뭔가 좀 있어 보이고 멋스럽기도 하다.

나도 라틴어는 잘 모르지만 위의 문장은 그리 어렵지 않다. verum/veri는 ‘진리’라는 뜻과 관계있다(영단어 veritas, veritable, verify 등이 여기서 유래). falsum/falsi는 false(거짓). verum-falsum는 주격, veri-falsi는 목적격이 아닌가 싶다. index는 우리가 아는 인덱스(지표) 동사로 쓰였고, sui는 self, et는 프랑스어에서처럼 and의 의미.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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