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리틀윙 2020. 9. 17. 16:21

방학한 지 1주일이 지났다. 3월부터 석 달간 온라인으로 만나고 6.3.(수)에 등교개학을 했으니 아이들과 직접 부대낀 것은 두 달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올해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2017년부터 4년 연속으로 3학년을 맡고 있다. 전임교(도량초)와 현임교에서 각각 2년씩 맡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홀수 해에는 너무 힘들었고 짝수 해에는 너무 행복한 것으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전자의 아이들이 나쁘고 후자의 아이들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초3 아이들은 모두 순박하다.

 

똑같은 학교와 똑같은 담임교사에 똑같은 3학년인데 홀짝으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원인이 뭘까 생각해본다. 전문용어로, 사회경제적 수준(socio-economic status, SES)와 발달단계 수준이 같은데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 교사들은 흔히 “해갈이 현상”으로 해석하곤 한다. 사회적 현상을 우연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곳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별한 인과관계를 발생케 한 최소한의 필연적 요소를 탐색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고 지성적인 자세다.

 

지난 주 방학식 하기 바로 전날에 있었던 일이다.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여학생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선생님, 큰일 났어요. 철수와 영호가 교실에서 막 싸워요!” 하는 것이다. 작년 같으면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나는 일이지만 올해 처음 겪는 일이라 속으로 ‘이 녀석들이 서서히 본성을 드러내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싸움이 아니라 그저 가벼운 장난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여자 아이가 하는 말이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남자 아이들의 세계를 잘 몰라서 싸우는 걸로 오해했어요!” 라고 정정보도(?)를 낸다.

 

사실, 철수와 영호는 장난기가 있긴 해도 시쳇말로 꼴통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반 남자 아이들의 면면을 진지하게 분석해 보건대...... A급 말썽쟁이가 최소한 2명은 있다. 판단 근거는 1~2학년 때 이 아이들의 행적(?)이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된 정보로부터다. 그런데 이전 학년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이 아이들(편의상 준표와 성태라 치자)은 ‘순한 양’이다. 성태는 나랑 케미가 잘 맞는지 학교생활이 재미있다고 말하고 준표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악동 근성을 인내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 듯한 징후는 보여도 아직 사고(?)를 친 적은 한 번도 없다.

 

확신컨대 준표와 성태가 만약 작년 우리 교실에 있었으면 나를 무척 힘들게 했을 것이다. 반대로, 작년 우리 교실에서 A급 악동 한둘이 지금 우리 교실에 온다면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 묘한 집단역학(group dynamics)의 이치는 형태심리학의 ‘게슈탈트Gestalt’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된다. 게슈탈트는 전체 혹은 전체성이란 뜻인데,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 이상”이라는 명제가 이 개념의 뜻을 잘 대변해준다.

고교 과학시간에 배운,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 개념을 원용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의 성격이다. 이를테면 4명의 아이의 악동지수가 각각 1, 2, 3, 4일 때 전체 지수의 총합(1+2+3+4)은 10 이상이거나 이하이지 정확히 10(=단순한 총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실에서 준표와 성태는 악동지수가 5쯤 되는 아이들이다. 둘이 합쳐서 10인데, 이 아이들이 작년 우리 교실에 왔다면 다른 악동무리들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 수치가 20정도로 증폭했을 것이다. 그런데 악동지수가 “하향평준화”되어 있는 올해 교실에서는 순한 양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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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역학이 시사하는 바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 속의 개인”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준표와 성태가 어떤 전체 속에서는 악동이 되지만 다른 전체 속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

 

그러므로......

1.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구조(=전체)를 탓해야 한다.

2. 사람을 바꿀 것이 아니라 구조(=전체)를 바꿔야 한다.

3. 악한 사람도 선한 구조 속에 오면 선하게 되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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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어느 군 지역에서 뺀질이로 소문난 행정실장이 있었다. 소규모 학교에서 교사들은 일에 치여 동분서주하는데, 행정실 일은 하급 직원에게 다 떠넘기고 탱자탱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뺀질이가 경북의 다부초처럼 의욕적인 교사들이 모여 열심히 혁신교육을 경작해가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교사들이 퇴근 시간 이후에도 모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해갈 때 처음 몇 개월 동안은 투명인간처럼 ‘마이웨이’를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질적 이익이 없는 곳에는 조금도 마음을 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공동체” 속에 발을 담그고 교사들과 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