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정치적 중립

리틀윙 2021. 1. 27. 10:53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가 남의 지갑을 슬쩍 하다가 건너편에 있는 한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소매치기는 이 목격자를 향해 손에 든 면도칼을 보여주며 입 조심하라는 신호를 건넨다.

 

목격자는 자신의 안전을 지킬 것인지 정의를 지킬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상황에서 목격자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이 둘 밖에 없다. 그것은 간단히, 범인을 도울 것인지 피해자를 도울 것인지로 요약되는 입장이다. 명백히 이 두 입장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며칠 전에 전국 법관대표회의에서 검찰총장의 징계사유인 ‘판사 사찰’ 의혹이 안건으로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다. 그 이유인즉, 법관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판사 사찰은 중대한 범죄다. 다름 아닌 법관의 정치적 중립 혹은 사법적 소신을 위협하는 심각한 범법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의혹에 대해 입을 닫는 것이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은 사고가 미분화된 저급한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을 알고 있거나 파헤쳐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소매치기 목격자에게 도덕적 중립이라는 입장이 존재하지 않듯이, 법관회의체에 판사 사찰 의혹에 대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입장도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중립을 들먹이며 의혹에 대해 침묵하겠다고 선언하는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다.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에게는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을 들어 유죄를 확정한 법관들이 검찰총장의 판사사찰 의혹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중립이라니... 고매한 법관님들이 우리 교사들이나 국민들에게 던지는 가르침이 소매치기가 승객에게 건네는 신호와 오버랩 된다.

다치지 않으려면 정의 따위는 잊고 입 다물고 살지어다!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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