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나를 규정하는 한 낱말

리틀윙 2021. 1. 27. 11:12

요즘 다시 비고츠키 공부에 빠져들고 있다. 새로운 책에서 비고츠키에 관해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의 단서를 발견할 때, 심금을 울리는 비고츠키의 혜안이 담긴 한 문장을 만날 때 크나큰 희열에 젖는다. 독서를 하면서 느끼는 이 기쁨은 실로 광부가 노다지를,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할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문득, 이런 나를 보면서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릇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멀고, 가장 친숙한 것이 가장 낯선 법이다. 가장 어려운 공부/탐구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십 중반을 지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지 않고선 이웃과 세상을 이해할 수 없거늘...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역설적으로 누구나 본인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까닭에 정작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너무 많은 정보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정리가 안 될 때는, 그 사물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낱말을 추출해낼(abstract)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방법론을 빌리면 추상하기(abstract)다. 어떤 사물에 내재한 이런저런 특징들 가운데 그 사물을 표상하는(represent) 단 하나의 낱말로 규정하기, 마르크스의 표현으로 “최고 수준의 추상”을 해낼 때 그 사물의 본질이 밝혀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플로베르는 “한 사물을 정확히 규정하는 낱말은 하나뿐이다”라는 일물일어(一物一語)론을 남겼다.

 

나를 규정하는 단 하나의 낱말은 “치열함”이다. 나는 어떤 대상에 흥미를 갖고 뛰어들면 끝까지 파고드는 편이다. 어떤 사물에 치열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사리를 정확히 분별하고자 시시비비를 잘 따지려 한다. 사실, 학문 하는 사람이나 음악 하는 사람에게 이런 습성은 필수다. 천재적인 뮤지션은 악기의 조율이 약간이라도 틀리면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치열한 사람은 흔히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치열함과 사회성은 아무 관계도 없다. 사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개를 좋아하지만 사람을 더 좋아한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문제를 일으킬 경우도 그 집단을 구성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의협심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무릇 이해관계로 점철된 인간 관계망에서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을 사랑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불선한 소수(주로 권력자들)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성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오히려 치열한 사회성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 치열한 사회성 때문에 나는 내가 몸을 담아온 그 어떤 조직 내에서도 trouble-maker 노릇을 해왔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조직 전교조에서 제일 심하게 그랬다. 전교조가 문제가 많아서가 아니라 전교조를 치열하게 사랑해서 그랬다. 한때 전교조 본부게시판에서 하루에 한 편씩의 치열한 글을 올리고 나의 의견을 달리하는 동지들과 치열하게 논쟁했다.

 

2013년 이후 전교조게시판에서 퇴장했다. 대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열심히 글을 써왔다. 나의 정체성이 ‘치열함’이다 보니 나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격언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다. 세상은 정 맞기를 자처하는 모난 돌 때문에 발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치열한 글쓰기를 하다 보니 페이스북에서도 가끔씩 크고 작은 내상을 입곤 했다. 사실 나는 보기보다 마음이 약하고 상처를 잘 받는 편이다. 그런데 나이를 들어서인지 요즘은 치열한 글쓰기를 피하게 된다. 페이스북에서 일정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동안 비고츠키 원서를 많이 읽었다.

 

치열한 글쓰기 못지 않게 치열한 책읽기도 세상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글쓰기보다 책읽기의 중대한 장점을 발견했다.

치열한 글쓰기와 달리 치열한 책읽기는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비고츠키, 공부할 게 너무 많다.)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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