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야구선수 류현진에 대한 단상

리틀윙 2020. 9. 17. 16:42

90년대말 IMF로 온 나라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한국 야구선수로서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날린 박찬호 선수의 경기가 큰 위로가 되었다. 5일마다 박찬호가 등판할 때 많은 야구팬들이 새벽잠을 설치며 LA다저스를 응원했다.

 

그 뒤 류현진이 같은 팀에 진출하여 박찬호의 명성을 이어받았고 그 유명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박찬호가 FA 대박을 내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옮긴 뒤 하향세에 접어들면서 ‘먹튀’ 오명을 썼던 것과 달리, 류현진은 올해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한 뒤에도 좋은 성적을 내며 홈팀 팬들은 물론 메이저리그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류현진의 활약에 힘입어 줄곧 하위에 머물렀던 블루제이스가 올해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실시 되고 있다.

 

사실 류현진은 메이저리그에서 특급 투수는 아니다. 작년까지 동료였던 클레이튼 커쇼의 낙차 큰 커브나 게릿 콜의 광속구 같은 무기가 류현진에게는 없다. 투수의 보편적인 역량 지표라 할 구질 자체만 놓고 보면 박찬호보다도 부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류현진이 박찬호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는 것이나, 초특급투수 커쇼(작년)나 게릿 콜(올해)보다 팀에 더 큰 기여를 해내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야구 외적인 요인으로 정신적인 면과 함께 인품의 안받침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현장교육학자인 내가 뜬금없이 류현진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특히 투수에게 야구는 고도의 멘탈 경기다. 동료들의 수비 실수로 주자가 누상에 나갈 때 많은 투수들이 평상심을 잃고 볼넷이나 안타를 맞고 실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름 아닌 박찬호가 이런 면에서 심한 취약성을 보였다.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가는 법인지라, 투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야수들이 부담이 돼서 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결국 투수 자신을 비롯하여 팀 전체에 악순환이 빚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류현진에게는 이런 면모를 전혀 엿볼 수 없다. 동료가 실수를 하면 오히려 비상한 집중력과 투혼으로 위기를 타개해 간다. 그리고 동료들은 이런 투수가 고마워서 다음 타석 때 안타를 치거나 하면서 빚을 갚는다. 이처럼 위기상황에서 투수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보이느냐에 따라 악순환 혹은 선순환의 상반된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류현진은 자신의 활약으로 팀이 승리할 때도 그 공을 동료들에게 돌리는 겸손의 미덕을 보인다. 감독이나 구단에서 전략적 차원에서라도 팀의 에이스를 한껏 부추길 때도 류현진은 약간이라도 으스대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훌륭한 선배를 후배 선수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KBO의 최약체 한화이글스에서 활약할 때 류현진에게는 ‘소년가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세월이 흐른 지금 토론토에서 소년은 최고참 선수가 되었다. 토론토는 메이저리그 30개 팀 가운데 연령층이 가장 어리다. 경험이 일천한 선수들에게 올해 류현진이 가세하여 든든한 가장 역할을 하면서 팀워크를 쇄신해가고 있다. 만년 꼴찌 토론토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수 년 만에 가을야구를 경험할 수 있게 된 이변의 실체는 ‘류현진 효과’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류현진 효과를 구성하는 내용물은 6이닝동안 8개의 안타를 맞고도 1점밖에 내주지 않는 빼어난 위기관리능력 따위보다 야구 외적인 면으로 류현진의 훌륭한 인품이 차지하는 면이 크다. 사실 LA다저스에서는 류현진의 이런 비범한 자질이 팀에 영향력을 미칠 여지는 별로 없었다. 잘난 선수들이 너무 많은 팀이기 때문이다. 블루제이스는 다저스와 정반대로 팀 컬러가 소박한 팀이다. 류현진을 응원하는 모든 한국인들이 그랬겠지만 나는 그가 작년에 다저스라는 최강팀에 계속 머물러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끼는 영광을 누리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봐서는 류현진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 제대로 갔다는 생각이다.

 

신영복 가라사대, 역사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전교 1등에 평생 1등급을 독차지 해온 에이스들이 세상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즘, 화려한 개인기는 없으되 봄바람처럼 따뜻한 품성과 대인배적인 리더십으로 우리의 류현진 선수가 잠재력이 풍부한 후배 선수들을 잘 이끌어 메이저리그에서 신선한 돌풍을 일으켜주길 바란다.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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