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되찾은 양심

리틀윙 2020. 8. 2. 01:11

금고털이범 지미 발렌타인이 출소한 며칠 뒤 인근 도시에서 잇따른 금고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고도의 기술로 특수 제작된 금고임에도 범인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돼지 저금통 털 듯이 감쪽같이 털어간 것이다. 베테랑 형사 벤 프라이스는 이런 신통한 기술의 소유자는 세상에 딱 한 사람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미 발렌타인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엘모어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착해 새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름까지 랄프 스펜서로 바꾸고서 구두점을 차려 예전과 달리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자 했다. 사업이 번창하여 지미 아니 랄프는 마을에서 모두로부터 호감과 존경을 받는 유능한 청년 사업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더욱 좋은 것은 평소 흠모해온 은행장의 딸 애너벨의 마음을 싸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사교성이 뛰어난 랄프 스펜서는 애너벨의 가족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애너벨의 언니와 그녀의 어린 두 딸 아가다와 메이도 있었다. 하지만 랄프 아니 지미의 과거를 아는 벤 프라이스 형사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물증이 드러나는 대로 체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미와 애너벨의 가족들은 아침 식사를 한 뒤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장이자 미래의 장인인 아담스 씨는 새로 구입한 금고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눈 파는 사이 애네벨의 조카 메이가 장난으로 동생 아가다를 금고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아이의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했다. 금고 구입처에 기술자를 부르면 해결할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하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이고 아이는 산소 부족으로 10분 이내에 죽을 형편이었다.

 

아이의 이모인 애너벨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랄프에게 “어찌할 수 없겠냐?”고 사정했다. 사실 랄프에게 이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랄프는 약혼녀를 향해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너벨! 당신의 가슴에 꽂힌 장미꽃을 내게 주지 않겠소?”

 

애너벨이 영문도 모르는 채 장미꽃을 건네주자 랄프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면서 연장통에서 연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 연장통은 오후에 친구에게 전해주려고 챙겼던 것이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물건이지만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주려했던 것이다.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 달리 지금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용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아이를 살리자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장밋빛 인생이 잿빛으로 변하고 감옥으로 향해야만 한다. 그렇게 랄프 스펜서는 자신의 모든 행복을 뒤로 하고 지미 발렌타인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너무 간단하게 해결한 뒤에 지미 발렌타인은 은행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벤 프라이스에게로 다가가서 “같이 가야 할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형사도 지미 못지않은 극적인 반전을 연출해 보이며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스펜서 씨,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

 

오 헨리의 단편집에 나오는 [되찾은 양심Retrieved Reformation] 이야기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도서관’이란 문물을 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푹 빠져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이 ‘오 헨리 단편집’이다. 말하자면, 오 헨리의 이 책은 내 독서 이력에서 첫사랑과도 같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나는 오 헨리의 책을 사랑한다. 최고의 문학 작가 한 사람을 꽂으라면 기꺼이 이 이름을 말할 것이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이 감동과 흥미로 충만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오 헨리는 금융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그 불행한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어 오 헨리는 감옥에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접할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감옥생활이 자기 문학세계의 보고로 작용한 것이다.

 

오 헨리의 작품 가운데 [크리스마스 선물]과 [마지막 잎새]가 유명한데, 그에 비해 [되찾은 양심]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제일 사랑한다. 오 헨리 작품세계의 특징이 ‘반전’인데, 그 묘미가 극적으로 표현된 작품이 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오 헨리 작품 속의 반전은 추리소설 따위의 그것과는 달리 품위와 감동이 있다. 반전이 역설의 진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버려야 한다. 자신이 침묵하면 아이는 죽을 것이지만 아이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지미 발렌타인은 자기를 버리고 생명을 구했다. 이 위대한 실천의 장본인이 금고털이라는 중죄를 범한 인물이라니......

 

지미 발렌타인 외에 벤 프라이스의 기행 또한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흥분을 안겨다 준다. 어찌 보면 그는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직무에 충실한 알파고 같은 인간보다 인간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때론 편향된 길을 가는 사람에게 훨씬 깊은 정을 느낀다.

 

'되찾은 양심'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장면은, 지미가 약혼녀에게 "당신 가슴에 꽂힌 장미꽃을 떼서 내게 달라"고 한 것이다. 장미꽃을 끝으로 애너벨과의 인연과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사춘기 때 이 사내가 너무 멋있다는 생각을 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내가 그 영향을 받아온 것 같다. 책의 어떤 한 문장이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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