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타인을 위한 메타인지

리틀윙 2020. 8. 2. 01:10

늘 가던 미장원이 문을 닫아 다른 곳을 찾았다. 둘 다 집 근처에 있는 남성전용 미장원이다. 내가 입장 했을 때 한 사람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내 순서가 돼서 미용 의자에 앉아 내 폰에 저장해둔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깎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이렇게 못 한다. 다른 미장원에 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려 보건대, 내가 까다로운 스타일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사진을 보여주며 주문하는 태도를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니, 이 사진과 비슷하게 대충 깎아주시면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분은 “이렇게 여러 말이 오가게 하는 자체가 까다로운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나가라고만 한다.

 

옥신각신 불편한 말이 오가니 앞 손님도 미장원을 나서다가 발길을 멈추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남성은 10년째 단골손님으로 주인이 작년에 이곳으로 터를 옮겼음에도 멀리서 찾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사정이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서비스를 거부당한 것도 황당한데 마치 내가 주인 여성을 해코지할 위험인물로 비춰지니 화가 날 일이다. 예전 같으면 이 시점에서 폭발하며 준엄하게 응징을 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갑질을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인 것이다. 내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립상황의 전체 지형이 투명하게 통찰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돈 벌려고 하는 일인데 새로운 고객을 애써 내쫓으려할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 중요한 통찰은,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지 못해서일 뿐 근본적으로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일견 경우가 바르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실상은 아주 경우 바른 사람일 수 있다. 이 집을 두 번째 찾았는데 먼저 번에 머리를 깎으면서 “내가 이용하던 근처 미장원이 폐업을 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말을 하니, 이분은 자기 때문에 타격을 입어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 미안하다며 내게 그분이 옮긴 미장원 위치까지 알려주며 거길 이용하라는 말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몇 행동양식으로 미루어 “이분의 삶에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실리를 위해 자존감을 버리지 않는 소신을 지닌 사람은 신뢰해도 좋다는 것이 나의 인간관이다.

 

아마 그분은 자신이 발설한 과도한 발언에 대해 스스로도 걱정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과감성의 배경에는 아직 문을 나서지 않은 응원군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역으로 내 입장에서는 그러한 배경이 나의 호승심을 더욱 부추길 수도 있었다. “너거 둘 다 덤벼봐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인격과 이 상황에 대해 나쁘지 않은 판단이 선 이상 나의 기질을 발동할 이유가 없었다.

 

“아주머니, 지금 제 얼굴을 보십시오. 제가 화난 것 같습니까? 제가 요구하는 대로 깎아주지 않으셔도 아무런 불평 안 할 테니 편한 마음으로 일 하십시오. 서약서라도 써 드릴까요?”

 

이 말 한마디로 상황은 종료되고 대기하고 있던 남성도 퇴장했다. ‘윙!’ 바리깡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10분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아주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누구나 삶의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죠. 머리 깎기 전에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깎아 달라’고 하는 손님들에게 상처를 입은 적이 여러 번 있어서......” 이 말을 할 때는 다소 무거운 톤이었는데, 몇 초 뒤 이어진 “그런데 사장님이 오늘 그 트라우마를 벗게 해주셨어요!”라는 말은 밝아 보였다.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도 세 보이지만 나만큼은 아니다. 나는 기질이 무척 강하고 말빨도 센 편이다. 어린 시절엔 몰라도 사회생활을 한 뒤로 지금까지 나는 싸움에서 져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는데, 그날 내가 그런 경험을 했다.

 

나는 이성과 감성, 지성과 인성은 나란히 간다고 믿는다. 아는 만큼 사물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예전보다 좀 더 착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메타인지 역량의 성장과 관계있을 것 같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는 자신의 인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흔히 ‘성찰’이라 일컫는 것이 메타인지와 관계있다.

 

모든 상황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상대(객체, object)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인식에 대한 인식”은 종국적으로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헤겔의 용어로 설명하면, 최초 ‘즉자적in oneself’ 인식에서 ‘대자적for oneself’ 인식(낮은 수준의 메타인지)로 갔다가 ‘대타적/타인을 위한for others’ 인식(높은 수준의 메타인지)로 발전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부분의 분쟁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만 사태를 바라보고 자기주장만 펼치는 탓에 기인함”을 생각하면 대타적 메타인지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다툼과 민원(일러바치기)이 발생하는 혼돈의 초3교실에서 모든 분쟁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예쁜” 아이의 특징은 착한 것이 아니라 메타인지가 발달해 있는 것이다.

 

어른 세계에서 이를테면 지적 장애를 겪는 즉자적 인식 단계에 있는 사람은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분쟁은 일정한 자기 변호 능력을 갖춘 대자적 인식 수준의 소유자들 사이에 발생한다. 모든 사람들이 대타적 인식 역량을 지닌다면 실로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교육의 목적을 “모두가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라 할 때, 우리 학생들이 함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 대타적 메타인지역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메타인지가 발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충돌할 때, 전자가 후자를 배려해야 한다. 전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수 있고, 후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인식 능력을 갖춘 ‘죄’로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양보하는 만큼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사람이다.

 

(사족: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은 메타인지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갈등은 합리적인 제도개선 투쟁 따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메타인지가 발달하면 그런 투쟁 또한 서로의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며 승리할 수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최선의 전략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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