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학부모에게

영어교육의 중요성과 올바른 방향

리틀윙 2020. 9. 17. 16:31

주위 사람들로부터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가끔씩 듣는 편이다. 이 글을 통해 고백하건대, 이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저 여러 분야에 흥미(관심)가 많고 때론 박학다식한 척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실제로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본다.

 

지적 역량과 관련하여 내게 작은 재주가 있다면, 영어 실력이 조금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외국 사람과 영어로 유창하게 소통하거나 하진 못한다. 다만 영어 사전 없이 웬만한 영어 글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은 있다. 내가 박학다식한 척 할 수 있는 것은 이 덕분이라 하겠다.

 

어제 쓴 영화 평론 글의 예를 들면, 아바(ABBA)의 노래 ‘Fernando’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는 99%가 기존 나의 지식이 아니라 그 글 쓰면서 영문 위키 피디어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것이다. 영문을 독해할 역량이 없다면 나의 글은 훨씬 빈곤한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영어교육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세간에 흔히 회자되는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화두를 던져 본다. 나는 이 말이 절반은 옳고 절반은 그르다고 생각한다.

 

말하기(speech)와 관련하여서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의 영어몰입교육(English immersion education)은 실패라고 생각한다. 독해력과 관련하여서는 위의 말에 반대한다. 이 같은 논거에서 나는 영어교육의 방향이 영어몰입 대신 문법과 독해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비고츠키의 명저 [생각과 말 Thinking And Speech]에 따르면, 생각과 말은 그 발달 경로가 다르다. 이중나선구조로 되어 있다(사진). 생각과 말은 출발 지점이 다르지만 때론 만나기도 하고 다시 분리되기도 하는, 접합과 분화의 연속이다.

 

생각과 말의 발달 경로가 다름에 따라, 사고력은 깊지만 화술이 좋지 않은 사람과, 반대로 화술은 좋아도 사고의 깊이는 얕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가 더 바람직할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영어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만약 위 두 경우의 당사자가 어른이고 실용성에 국한한다면, 후자가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군부대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담화(conversation)의 수준이 깊이를 요하지 않기 때문에 얕은 영어라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영어몰입교육이 대두된 배경이 이런 맥락이었다. 기존 문법 위주의 영어 교육을 10년 가까이 받았는데 외국 사람 만나면 영어 한마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다음과 같은 논거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첫째, 장사든 뭐든 외국인과 상시적으로 접촉하는 국민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할 필요는 없다.

 

둘째, 이런 수준의 영어실력은 영어교육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형성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미군부대 상인들에서 보듯 영어몰입 상황에 노출되면 저절로 길러진다. 이런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굳이 초등 교육과정에 영어 수업을 배치하고 유치원 때부터 학원 다니며 꼬부랑말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다.

 

셋째, 미군부대 상인 수준 이상의 깊이와 유창함이 겸비된 영어 스피치 실력을 기르는 것은 현재의 영어수업 인프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영어의 바다에 빠질 때(immersion) 가능한데, 사회적 여건은 물론 교육 체제 면에서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초등의 경우 1주일에 2~3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중등의 경우 입시 위주의 교육 형편 상 영어몰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시기에 영어몰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실력이 지속되려면 꾸준히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미국 유학 간 사람도 귀국해서 영어를 안 쓰면서 이내 다 까먹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어몰입교육은 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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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과 말은 접합과 분화로 점철되지만 평행선이 아닌 나선형으로 발전한다. 초기의 접합 지점과 후기의 접합 지점은 그 수준이 다르다. 전자와 후자의 간극 수준은 지성의 발전과 정확히 비례한다. 지성이 성장한 만큼 수준 높은 화술을 구사할 수 있고 사용하는 어휘력의 수준만큼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발달 순서에 관한 설명에 있어 피아제와 비고츠키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의 언어 발달에 대해 피아제는 내적인 말(자기중심적 말=혼잣말)에서 외적인 말(사회적 소통을 위한 말)로 발전해간다고 했지만, 비고츠키는 그 반대 방향을 주장했다. 훗날 피아제는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비고츠키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위의 문맥에서 외적 말은 영어몰입교육과 관계있고 내적 말은 독해 위주의 교육과 관계있다. 사회적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영어교육은 지적 성장을 비껴간다. 반면, 독해력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영어교육은 그 자체로 지성의 단련이 수반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성문종합영어에 수록된 명문장들을 통해 영어실력과 함께 지적 감수성 그리고 영어공부에 대한 흥미를 키워갔다. 오늘날 초등학생은 영문 이솝우화 따위를 통해 내 경우와 똑같은 성취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적 말과 내적 말 사이의 위계는 화술과 지성, 영어몰입과 독해의 역학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지성이 빈곤하면서 화술이 있는 사람과 그 반대의 경우, 후자의 발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전자와 후자는 어휘력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일진대, 비고츠키의 말 대로 "하나의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baby English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과 다소 어눌해도 지성의 깊이가 있는 사람 가운데 상대방이 누구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더 느낄까?

 

영어몰입과 마찬가지로 독해력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학습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그런데, 스피치는 주변에 외국인이 없으면 반복할 수 없다. 하지만, 영어문장은 이를테면 구글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으니 영어 사용의 생활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영어로 검색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 처음에는 영어사전 찾느라 더디고 힘들지만, 차츰 습관화되면 어휘력이 늘고 어휘력이 늘면 독해력도 늘게 된다. 그리고 한글 검색에서는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의 획득에 따른 심리적 보상(=정적 강화)이 이루어지면서 검색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 어떤 분야든 역량의 증진은 과업이 고역이 아닌 즐거움이 될 때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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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해 위주의 영어교육의 중요성은 성문종합영어에 빠져들었던 나의 고교시절보다 ‘정보화시대’로 상징되는 지금 훨씬 증대되고 있다. 예전에는 영문으로 된 정보를 잘 접할 수 없어서 ‘영어의 생활화’가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초3 아이들에게 내가 역설하는 말인즉,

>>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에 비유하는데, 한글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호수’라면 영어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태평양’이다. <<

 

정보의 바다 깊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확장되기 때문에 내 말의 의미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그룹 아바의 노래 [Fernando]의 예를 다시 들면, 소시 때부터 이 노래의 배경이 궁금하여 오래 전부터 검색을 했는데 조회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간에 위키피디어가 업데이트 되어 어제 글을 쓸 때는 나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지적 희열로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 만큼 나는 “영어 공부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신해 마지않는다!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할 필요가 없다?

안타깝게도 교사들 가운데 이런 말씀 하시는 분 더러 있다. 주로 혁신교육 운동하는 교사들이다. 혹 이 분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영어로 귀한 정보를 건져 올리면서 지적 희열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지도 모른다.

 

사물의 가치는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교사라면 그는 학생들에게 그것의 가치를 전달하지 못한다. 누가 말했던가?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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