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모든 것을 의심하라!

리틀윙 2020. 4. 4. 21:19

모든 것을 의심하라!

 

철학사에서 ‘회의론’이란 한 획을 남긴 데카르트의 말로 유명하지만, 칼 마르크스도 똑같은 말을 즐겨 썼다. 마르크스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의미의 라틴어 “De omnibus dubitandum”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학문하는 사람,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이 경구를 영혼 깊숙이 간직할 필요가 있다. 무릇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이나 가치관은 대부분 미성숙한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데, 우리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수용한 것이 아니라 어떤 외적 권위나 강제에 의해 주입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듯 왜곡되게 형성된 인식을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라 일컬었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 용어는 프랑스대혁명기에 트라시Tracy가 최초로 사용하였는데, 우리가 아는 ‘이념’이란 의미의 이데올로기가 이것이다. 마르크스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란 의미로 이 말을 썼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력하다. 뭐든 어릴 때 품은 것이 평생을 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성은 수능시험성적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 역량이 그 잣대가 되어야 한다.

 

자명한 진리라 생각하는 것 가운데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말도 안 되는 허구와 위선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것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우선, 아이들 위인전으로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훌륭한 인품과 거리가 먼 사람이 많다.

콜럼버스는 아이들에게 용기와 모험심의 표본으로 소개되지만, 히틀러에 버금가는 대량학살을 주도한 인간백정이다. 발명왕 에디슨은 인간에게 빛을 가져다 준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에 비견되는 영웅이라 할 수 있지만, 인품은 훌륭함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에디슨의 발명욕구는 인류의 번영보다는 개인적 부의 축적에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요청에는 매우 인색한 것이나 전기의자라는 비인간적 사형집행기구가 그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위인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인성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화 가운데도 비판적인 관점으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 많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표상되는 동화 신데렐라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가 있으니, 우리나라 옛날이야기 가운데 [효녀심청]을 생각해보자.

 

늙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어린 여자 아이를 용왕의 재물로 바친다는 설정은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인신매매 내지 아동성매춘이며, 아무리 무난하게 비평하더라도 “심각한 아동학대”의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봉건사회의 시대정신의 한계를 생각하여 그 시대에선 있을 수 있는 상황설정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오늘날 아이들에게까지 효 실천의 모범으로 안내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교육과정 구성”이라 할 수 있을까?

 

 

 

 

 

비슷한 맥락에서, 3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장금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최근(2017) 개정교육과정에서 교과서에 동영상이 많이 나온다. 공부 시간에 합법적으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자체도 대박인데, 더구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니(상영시간이 무려 30분 가까이 된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장금이가 궁녀가 된단 말이야?

 

영상 중 스틸사진으로 교과서에 실린 장면이다. 조선시대에 궁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궁녀가 되는 것은 왕의 여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거기서 음식을 만들건 뭐를 하건 궁녀가 왕의 여자라는 본질은 차이가 없다.

 

왕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으면 팔자 고친다고? 그렇다. 수라간 무수리도 이영애(장금이)처럼 예쁘면 성은을 입고도 남는다. 문제는, 성은을 입는 모든 무수리가 장희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왕자가 수백 명이 생산되어 왕족 가계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필연적인 제어장치가 발동할 것이다. 그것이 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대부분 궁녀의 비참한 말로로 이어질 것이다. 임금이 어린 애에게는 음욕을 품지 않는다고? 그건 효녀심청의 설정과 모순된다. 조선시대에는 ‘어린이헌장’에 명시된 수칙이나 아동학대 개념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맥락을 생각하면, [장금이]는 TV 드라마는 몰라도(대표적인 한류 드라마이다) 만화영화로 제작될 성질의 것은 아니고 더구나 교과서에 실릴 교육소재는 절대 아니다.

 

사족)

수라간 무수리가 궁궐 드나드는 잘 생긴 남정네와 정분을 나누는 드라마 설정은 SF 수준이다. 왕의 여자가, 어디?... 왕의 여자를, 감히? 삼족을 멸할 중죄이다. 그리고 ‘자유연애’라는 정서는 서구사회에서조차 빅토리아시대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던 지극히 현대적인 개념이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몰역사적인 상황설정이 학생(혹은 성인) 시청자들에게 그릇된 역사인식을 학습시킬 것은 당연하다.

 

 

2.15.

'이론과 실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동주의심리학  (0) 2020.08.02
전문가 바보  (1) 2020.04.04
메타인지  (0) 2020.04.04
오개념 바로잡기 : 다수자  (0) 2020.04.04
실천과 이론  (0) 2020.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