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전문가 바보

리틀윙 2020. 4. 4. 21:24

바보 혹은 백치를 뜻하는 영단어 ‘idiot’의 어원이 흥미롭다.

“바보 같이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을 뜻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동체의 문제 즉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자유 시민의 중요한 자질로 생각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로 “Idiotes(ΙΔΙΩΤΕΣ)”가 생겨났다. 이 낱말은 자기라는 뜻의 ‘idios’에서 유래한다고 하니, 결국 ‘백치(idiot)’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경멸조의 용어가 그 기원이라 하겠다.


이 말이 독일로 건너가서는 ‘Fachidiot’라는 단어를 파생시켰다. 독일어로 Fach는 ‘특별한 분야’, 혹은 ‘전문 분야’라는 뜻이고, idot는 영단어 의미 그대로 ‘바보’이다. 따라서 Fachidiot는 “어떤 한 분야에만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나머지 분야에는 무지한 사람”을 일컫는 ‘전문가 바보’라는 의미의 말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도 ‘전문가 바보’라는 어휘가 똑같이 존재한다. 센몬바까専門バカ.


전문가바보라는 말은 ‘따뜻한 얼음’이란 수사처럼 형용모순을 이룬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설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비극적으로 작용하는 점이다. 세상살이에는 무관심하고 인문학적 소양이나 정치적 식견이 백지 상태인 전문가의 전문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권위를 얻을수록 그는 사회를 망칠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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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형으로 명문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공안검사가 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 이들은 민주투사들에게 고문을 해서라도 운동세력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들의 빗나간 애국심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들 가운데는 그 고고한 전문성에 따른 권위의 날개를 달고서 검찰총장을 지낸 뒤 보수정당에서 지도자가 된 경우가 많다. 박근혜더러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라 하는가 하면, 종북타령 외에 이들이 구사하는 정치적 수사는 그저 빈곤할 따름이다. 한 인간이 구사하는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인바(비고츠키), 이들에게선 도무지 지성을 엿볼 수 없다.


이 나라 최고의 명문대 법대를 나온 이러한 인물들이 ‘전문가바보’가 된 인과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공부라는 것이 학문적 소양보다는 입신을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사회에서 시험점수와 지성의 깊이 사이에는 별 상관이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에서 학생들은 돈 되는 공부에만 충실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한다. 법대생들은 사법고시 패스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법철학’ 따위의 강좌에는 수강신청을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다. 진정한 법관의 자질은 철학에 있으련만, 그늘진 곳에 사는 이웃의 아픔에는 눈을 감고 법조문만 달달 외우는 이들은 법전문가바보가 된다.


그리고, 특히 군사독재 시절 이 나라 교육기관의 학문적 편향성이 전문가바보를 양산하는 기제로 한 몫 한 탓도 클 것이다. 새는 좌우 날개 짓으로 균형을 잡아간다. 인간의 이성도 어느 한쪽으로 편향 되어 있으면 균형 잡힌 사고가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학문세계에서 이런 경향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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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인 정치제도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시민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는 태도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시민을 노예와 대비되는 의미로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idiot’란 말은 자유인이면서 공동체의 문제에 무관심한 부류를 일컬었을 것이다.


독일어적 의미의 ‘전문가 바보’ 혹은 그리스어 의미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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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idiot나 fachidiot의 어원에 대해서는 노사과연 채만수 소장님으로부터 자본론 공부 때 배운 것이다. 

[자본론]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과 박학다식에 탄복하게 된다. 나는 속류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의 차이가 ‘전문가바보’와 ‘자유인’의 차이이고 그러한 차이는 그대로 학문적 역량의 차이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본질은 통섭(=융합교육과정)이다. 땅 한 군데를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지만 된다. 어떤 분야든 박학다식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인간 삶의 전 영역에 무관심한 학자, 특히 정치에 무지한 전문가바보는 죄를 짓기 쉽다. 박정희-전두환 시절 안기부에서는 대학교 학생처장을 미생물학 따위의 전공교수가 맡도록 조종했다고 한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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