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일본의 두 속성

리틀윙 2019. 9. 7. 06:48

요즘 한일 관계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고 해서 이번 방학에는 특별히 ‘일본’에 관해 탐구하고자 한다.


내가 아는 일본은 위대한 민족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국민들이 저 삼류 양아치 정치지도자 아베의 극우 정치책략에 휘둘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 민족의 비범한 저력과 이 바보 같은 국민의식이라는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둘을 연결해줄 고리를 찾는 게 내 공부의 목적이다. 마침내 그 퍼즐이 대충 맞춰지고 있다. 내가 길어 올린 첫 번째 통찰은 ‘학교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 지역의 한 실업계여고와 일본의 여고 사이에 자매결연이 맺어져서 두 학교 학생들이 서로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두 학교 학생들이 보여주는 태도가 너무 달랐다. 일본 여학생들이 먼저 한국 학교를 찾았는데, 이 학생들은 강당에서 열린 환영회 행사에서 너무 진지하다 싶을 정도로 조신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손님을 맞이하는 우리 여학생들은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학교 관계자들이 일본 교사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국교사들은 학생들의 이러한 경거망동이 ‘홈그라운드’인 탓에 빚어진 현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본 방문에서도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년 전에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이야기를 전하는 그 학교 교사나 듣는 나도 이 문제를 흔히 말하는 국민성의 차이로 해석했다. 지금도 이러한 평론이 크게 잘못된 것은 없다고 본다. 다만,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이 국민성의 차이에서 어느 한 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 쪽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내가 늘 강변하듯이)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지닌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듯이, 사물은 두 속성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는 이 두 속성을 함께 바라 봐야 하니, (조니 미첼의 노래 제목을 인용하건대) Both Sides Now!의 관점이 요구된다.


일본인들은 정말 예의 바르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약간이라도 폐를 끼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며 늘 몸가짐을 조심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다. 일본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맨 먼저 배우는 책 제목이 수신(修身)이라는 사실이 일본인의 이러한 삶의 태도를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예의범절이 바른 것은 좋은데, 이러한 엄격한 훈육방식 속에서는 아이다운 아이가 길러지지 않는다. 즉, 정숙한 일본 아이들의 자세와 대조를 보이는 우리 아이들의 경거망동은 어떤 면에서 사춘기 소녀다운 ‘발랄함’이라는 긍정적인 자질로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릴 때 형성된 자세가 평생을 가는데, 일본인들은 고도의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란 결과 일본 사회는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로 묘사한,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가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 Society’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인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늘 딴지를 걸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누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모두가 오른쪽을 본다고 한다. 여기서 ‘누구’는 막강한 권위를 지닌 자로서 현재의 ‘아베’같은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아베 같은 극우 정치 깡패들의 권위를 지지해주는 강력한 원천은...... 다름 아닌, ‘천황’이다.



우리가 섬나라 원숭이라고 경멸하는 이 작은 나라가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도발을 감행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천황제’에 있다. 또한, 일본이 망할 수밖에 없는 요인도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내재된 ‘경거망동’의 기질이 전혀 없기 때문에, 촛불혁명 따위는 꿈도 못 꾼다. 그래서 이 위대한 나라의 앞날은 한국보다 결코 밝을 수 없다.


사물은 성격이 정 반대인 두 속성(양극성, bipolarity)을 동시에 지닌다. 진리는 이 두 속성을 함께 바라볼 때 도달할 수 있다.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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