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태풍 차바가 닥쳤을 때 강기봉 소방교가 구조활동을 벌이다가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그런데 어제 강 소방관의 동료 장희국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아끼는 후배 동료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자기 삶을 포기한 것이다.
장희국 씨가 떠난 다음 날(어제) 장 소방관의 사물함을 열어 본 동료 소방관들은 오열했다. 장 소방관이 강 소방관의 제복을 3년 동안 영정처럼 걸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옷을 입을 때마다 그 영정을 보면서 장 소방관이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생각하면 그의 안타까운 자진이 결코 순간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헤아릴 수 있다.
문제는 살아남은 나머지 동료들의 삶이다.
동료를 먼저 보낸 죄책감 속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비장한 결의로 그 동료를 따라 간다면, 남은 동료들 또한 비슷한 트라우마로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급류에 빠진 자동차 속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시민의 신고를 받고 두 소방관은 현장으로 향했다. 후배인 강 소방관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동차에 다가갔지만 속에 사람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려 할 때 그 사이에 급격히 불어난 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전봇대의 손잡이를 잡고 사력을 다해 버텼지만 “선배님, 더 이상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 소방관은 후배를 혼자 보낼 수가 없다며,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물에 뛰어 들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목숨을 운에 맡기고 같이 물에 뛰어 들었다. 장 소방관은 살았고 동료의 몸은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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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운명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죽는 것일까?
확인되지도 않은 위기의 시민을 구하기 위해 절체절명의 순간에 갈등없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이 소방관의 마땅한 소임이라면 누가 기꺼이 그 일을 하겠는가?
더구나 많은 소방관들이 비정규직이라고 한다. 안 잘리기 위해 귀하디귀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이분들의 극단적인 ‘노동 조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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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에서 엄혹한 나치 시절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오직 운 덕택이라고 자조했다. 꿈속에서 먼저 간 동료들이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고 말하자 자신이 미워졌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브레히트도 살아남아서 좋은 시를 써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복무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이 강해져야 한다.
소방관들의 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트라우마에 빠뜨리는 것은 태풍과 화마가 아니라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 그리고 불합리한 근로 조건이다. 먼저 간 동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분들이 이 부조리한 구조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
장 소방관은 혼자 남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동료를 따라갔고, 살아남은 나머지 동료들 또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견뎌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살아남은 국민들도 약간은 슬퍼해야 한다. 국민의 공감과 슬픔이 커지는 만큼 이 분들의 고통과 비애도 줄어들 것이다.
사진은 생전에 장 소방관과 강 소방관이 의무실에서 동료의 다리에 부목을 대주는 모습으로 보인다. 다리 부상쯤이야 아무 일도 아닌 듯, 다친 동료의 다리를 향한 자애로운 손길에 행복한 웃음을 짓는 풍경을 보니, 시민을 왕처럼 섬기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 자신이 미워진다.
아침부터 가슴이 먹먹해진다.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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