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백범은 탁월한 독립운동가 김립을 왜 죽였을까?

리틀윙 2019. 6. 3. 16:20

1919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나라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쳐 항쟁하신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며 이 글을 쓴다.

 

선열들의 희생으로 나라를 되찾은 지도 어언 7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나라는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들이 득세하는 점에서 여전히 식민지다. 진정한 해방은 정신적 식민지를 청산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까닭에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해방을 이끈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진대,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인 이 땅에서는 좌우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로 인해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남한과 북한이 별로 다르지 않다.

 

남한 사회에서 독립운동의 화신으로 모두가 존경해마지 않는 위인으로 백범 김구 외의 인물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경찰이 김구 선생에게 붙인 현상금이 60만 원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100억이 넘는 금액이다. 하지만, 현상금의 액수 면에서 백범의 랭킹은 2위였다. 지금 화폐가치로 200억에 해당하는 현상금이 붙은 최고의 독립군 지도자는 약산 김원봉이다. 최근 밀정이나 암살같은 영화가 있기 전에 우리는 일제 경찰이 가장 두려워한 이 인물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방전후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식민지 수준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해방 후 김원봉은 이승만이 지배하는 남한을 버리고 월북하였지만, 김일성에게도 버림받아 감옥에서 한을 품고 자진하였다.

 

김원봉이 북한정권에게 숙청당했듯이, 김구가 남한의 이승만이 보낸 자객(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죽음은 영웅을 더욱 신성한 인물로 만드는 주술적 효과를 발한다. 하지만, 민족의 영웅 백범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김구 선생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일국의 독립운동을 이끌 만큼 선생의 정신세계는 그리 깊지 않았다. 철학의 빈곤은 필연적으로 운동의 빈곤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백범의 민족해방운동 철학은 테러리즘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천황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 대장을 폭살했다.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한민족의 분노를 세상에 알린 영웅적인 기개는 높이 살 일이지만, 이런 행위는 본질적으로 IS의 자살폭탄 테러와 다르지 않다. 개인의 희생에 터한 테러가 나라의 독립에 어떤 도움이 될지 판단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라 백범은 이념적으로 심한 우편향적 사고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백범의 최측근 비서로 이화림이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이화림은 김구의 애인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백범이 신임했던 동지였다. 하지만 이화림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백범의 독립운동 노선에 회의를 느껴갔다. 당시 사회주의 민족해방진영에서는 조직적인 대중교육과 군사조직에 기초한 무장투쟁 없이 독립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화림은 이에 공감했다. 이화림이 이러한 뜻을 표명하며 백범을 떠나려 하자 선생은 공산주의 사상을 좇아간다면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단호히 내친다. 이런 연유로 [백범일지]에는 이화림의 이야기가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가장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한 인물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는 것에서 우익 민족주의자 백범의 편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념적 편향성에 터하여 백범이 범한 가장 심각한 과오는 걸출한 항일애국지사 김립을 살해한 것이다. 무릇 대의를 좇는 집단 내에서 노선을 달리하는 그룹끼리의 투쟁은 불가피한 법이다. 하지만, 무장독립투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다반사로 벌어진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커다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관련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건이 김좌진 장군의 죽음(코뮤니스트 그룹에 의한 아나키스트 살해)과 자유시 참변(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룹과 상해파 공산당 그룹 간의 살육)이다. 김립의 죽음 또한 독립운동 진영간의 갈등이 빚은 참사인데, 이 탁월한 독립운동가의 처형을 주도한 인물이 김구 선생이란 점이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백범일지에선 김립을 러시아로부터 받은 운동자금을 개인적 향락을 위해 착복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만, 이는 김립의 살해를 합리화하기 위한 왜곡된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인 여러 자료를 근거로 판단할 때 김립의 삶은 지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김립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의 최측근으로서 해박한 지식에 국제정세에도 매우 밝은 당시 독립운동진영에서 보기 드문 인재였다. 김립은 191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당에 힘쓴 뒤에, 이듬해에 이동휘를 설득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참여시켰다. 김립은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와 외교관계를 열고자 분투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김립을 죽게 한 문제의 자금은 그의 탁월한 외교능력으로 획득한 것이었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2,50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레닌이 지원한 것은 사회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위해서였기에 그 돈은 당연히 김립이 속한 한인사회당의 몫이었다. 더구나 백범은 반공주의자가 아닌가?

 

김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혁명을 전후한 국제정세를 정확히 간파했다. 임정의 이승만이나 김구와 달리 영미 제국주의의 야욕을 통찰하고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을 지원하는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과의 연대를 위해 노력했다. 김립은 이동휘와 함께 1920년 상해에서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들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대립한다.

 

당시 상해 임정은 이승만의 기호파와 안창호의 서북파 간 대립이 지속되고 있었다. 무책임한 외교독립론으로 일관하는 이들의 노선에 회의를 느낀 사회주의자들의 문제 제기로 1922년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지만(국민대표회의의 절대다수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개조파(상해파 고려공산당), 창조파(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임정고수파(김구, 이시영, 조소앙)로 갈라져 나간 끝에 상해 임정은 일개 군소운동단체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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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등 역사 교사인 하성환이 쓴 [근현대인물 한국사](살림터)의 첫 번째 꼭지 비극적인 항일 혁명지사 코뮤니스트 김립의 내용에 부분적으로 필자의 관점을 덧붙여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글 말미에서 김립의 비극적 죽음이 독립운동전선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논평하고 있다. 아울러, 김립을 죽인 직접적인 세력은 김구가 이끄는 임정 경무국이지만 그들에게 살해 명분을 제공한 자들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아까운 인물이 김구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진한 아쉬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민족의 영웅 김구의 손에 의해 말이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은 백범의 후손들의 면면이었다. 백범의 첫째 아들 김인은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병사하였다. 그의 아내가 시아버지에게 자기 남편을 위한 페니실린 투약을 부탁하자, 백범이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며 단호히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한편,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은 박정희 정권 때 교통부장관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신의 아들 김양은 이명박 정권 때 국가보훈처장을 지냈고 박근혜 정권 때 10억의 뇌물을 받은 방산비리로 구속되었다. 백범의 손녀딸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후손들은 백범의 정체성과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점이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후손들 때문에 백범의 명성이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백범이 그렇게 가르쳤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경찰 현상금이 백범보다 두 배나 되었던 약산 김원봉의 혈육들의 삶과 너무 대조를 이루는 점에서 씁쓸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약산의 형제 5명과 사촌 4명은 이승만 정권 때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며칠 전(2019.2.24.) 작고한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씨는 북으로 간 오빠 때문에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모진 심문을 받았고 남편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3.1100주년을 앞둔 또 다른 며칠 전에 백범의 증손자가 TV에서 발언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소망한다는 말이 귓전을 맴돈다.

 

이 분과 관련한 또 다른 뉴스를 인용한다.

 

>> 그의 집안은 백범 김구라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후손이지만, 대대로 공군 장교로 복무한 군인 집안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신 장군이며, 아버지는 공군 중위 출신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다. 그 역시 학사장교로 3년을 복무하고 작년 제대한 뒤 현재(2015, 방산비리가 불거지기 전) 방위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작년에는 국방부로부터 '병역명문가'로 표창받기도 했다. 광복군을 창설한 백범 선생까지 포함하면 4대가 독립운동과 군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았다.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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