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공부하는 사람이 희망이다

리틀윙 2018. 11. 16. 07:59

(어제 있었던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주관의 워크숍 때 발표한 내용을 약간 손질해서 올린다.)

 

이번 여름방학 중에 경기도 안산의 모 초등학교에 강의하러 갔을 때 느낀 소회로 이야기를 열고자 한다.

 

경기교육철학연구회라는 모임에서 강의를 요청했는데, 이 학교 교사들이 모임 구성원의 주를 이루었다. 강의는 오전 1030분에 시작해서 오후 4시까지 거의 하루 종일 이어졌는데, 교사들의 학습 의욕은 불볕더위의 햇빛만큼이나 뜨거웠다.

 

무엇이 이 선생님들로 하여금 방학을 반납한채 폭염을 뚫고 이곳 학습의 장으로 향하게 했을까? 강의 끝난 뒤, 나를 섭외한 연구부장 교사와 심도 있는 질의응답을 나누었다. 말하자면, 그 시간 이후로는 내가 학습자가 되어서 그 분들에게서 배우고자 했다.

 

무슨 학점 따위가 주어지는 연수가 아니라고 한다. 순전히 내적 동기에 말미암은 배움의 욕구라 하겠는데, 그 동기가 된 것은 수업 실천이다. 이 학교 교사들은 요즘 평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교육과정 구성과 수업이 혁신교육실천의 전부였는데,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니 자연스레 평가 문제로 고민이 흘러가더라는 것이다.

 

같은 초등교사로서, 또 경북에서 몇 안 되는 자생적 혁신학교인 다부초에서 근무했던 교사로서 나는 이 분들의 지적 고민의 여정이 그려졌다. 평가 문제는 혁신교육실천의 종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난제인 만큼 그것은 철저히 교육이론과 철학의 안받침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이론과 실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아는 만큼 가르칠 수 있다. 아는 만큼 학생을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 수업이든 평가든 학생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학생에 대한 이해는 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가정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요한다. 그러므로, 교육 실천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앎을 요청하는 문제인 것이다. 내가 늘 교사는 본질적으로 지성인이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이 이런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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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분들의 남다른 학습의욕이 바람직한 교육실천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당위론에 입각해 발동한 것일까?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많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연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교사집단 내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어떤 위기의식에서 추동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식이 전부인 자발적 학습은 오래 가지 못한다. 배움의 욕구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떤 강력한 내적 동기가 바탕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학습에 대한 흥미라 하겠다.

 

내가 볼 때 이 분들은 지금 공부의 재미를 알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흥미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집단지성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공적인 학습의 요건은 브루너가 말한 적절한 불안이 있어야 한다. 인문학 공부에 도전하는 많은 학습자들이 이내 포기를 하는 것은 어려운 내용을 만났을 때 혼자 힘으로 해결이 안 되어 좌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공부는 나홀로 학습이 아닌 집단학습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기교육철학연구회라는 집단에서는 적절한 불안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집단지성이 구축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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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경기도는 이 나라 혁신교육 운동의 발상지다. 나는 경기교육철학연구회와 안산초 교사들의 교직살이 모습을 보면서, 경기도의 혁신교육운동 수준이 매우 성숙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성숙도의 힘은 공부하는 교사 문화에 기인한다고 나는 본다. 교실차원의 수업이든, 단위학교에서의 혁신교육 구축이든, 학교 밖의 교육운동이든, 아는 만큼 가르치고 아는 만큼 교육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일지 생각해보자. 경기도의 성숙한 교사문화는 진보교육감 체제의 원인일까 결과일까?

 

이 문제는, 주관-객관 변증법(subjectivity-objectivity dialectics)으로 논해야 한다. , 성숙한 교사문화는 성숙한 교육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양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라는 물음에서 나는 사람(주관)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길러낼 수 있지만,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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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현금의 경북교육연구소공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북보다 더 안 변하는 경북에서 우리 연구소는 반민주·반민중·반교육적 극보수주의 교육체제의 질곡을 극복하고 진보교육의 싹을 틔울 교육희망의 텃밭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 안산의 교사들과 같은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그냥 우직하게 일(교육이든 교육운동이든)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닌, 일을 왜 해야 하며 바르게 일을 하기 위해 지적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그 단련을 의무에서가 아니라 흥미를 갖고 자발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우리 연구소는 그런 노력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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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그런 사람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어렵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조직사업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지 말자.

목적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고, 혁신교육이니 진보교육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활동가들에게 맹목적인 헌신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런 강요는 요즘 통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80년대 학번이나 90년대 학번까지의 활동가들에겐 이런 게 통했다. 말하자면, ‘배신에 따른 조직의 쓴맛을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세계에서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활동가들은 일정한 실천의 대오를 유지해갔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강요를 하는 사람이 왕따 당한다. 세태의 변화와 무관하게, 조직보다는 사람을 귀하게 품어야 한다. 조직 없는 사람은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 없는 조직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업을 위한 사업을 하지 말자.

나는 우리 학교교육의 가장 심각한 적폐 중의 하나가 페이퍼워크에 있다고 말했다. 교육의 실적은 종이쪼가리 위에 있지 않은데 교사들은 매일 쓸데없는 페이퍼워크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소진시켜 간다. 교육운동판도 마찬가지다. 별 실효성이 없는 사업을 위한 사업’, 일을 위한 일에 활동가들이 번아웃 되어 간다. 과정 중심이 아닌 결과 중심의 사업 추진은 우리가 그토록 반감을 품는 제도권 교육관료들이 추구하는 실적 중심의 교육사업과 다를 바가 없다.

 

셋째, 이론과 실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이 글의 핵심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활동가에게 공부는 실천가(교육운동가)의 존재론-인식론-가치론의 통합이다. ‘교육의 속성 자체가 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존재론). 그리고 아는 만큼 실천할 수 있다(인식론). 끝으로, 아는 만큼 바르게 실천하고 바르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활동가에게 지적 단련은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이다(가치론).

 

존재론-인식론-가치론은 언제나 함께 기능한다. 예전에 몰랐던 것을 집단지성을 통해 하나 하나 해결해가다 보면 공부가 재미있어진다. 이 지적 희열은 자신의 영혼이 고양되어 가는 보람으로 이어진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그간의 자신의 무지에 대한 각성에 따른 겸손과 함께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겨난다. 무엇보다 올바른 앎은 올바른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된 삶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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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라 한다.

좋은 말이지만, 구체적이지 못하다. 사람 자체가 희망인 것은 아니다. 태극기 부대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아는 만큼 실천할 수 있다. 앎과 실천은 유기적으로 통일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 운동 진영에서 공부하는 활동가를 잘 볼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해가는데, 학생운동 할 때 습득한 얕은 사회과학 지식으로 지금 이곳의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올바른 운동을 펼쳐갈 수 없다.

 

이론과 실천은 별개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론과 실천은 나란히 나아간다.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며,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오직 실천이 중요하다면서 지적 단련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태극기 할아버지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냥 사람이 희망인 게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희망이다.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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