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학부모에게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떠안는다

리틀윙 2019. 3. 27. 11:19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금기시 되는 분위기다. 사회운동 따위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교사가 굳이 마르크스주의를 알 필요가 뭐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교육현장에서 학생 지도에 그대로 통용되는 맥락에 관한 이야기다. 교사나 학부모에게 유용하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떠안는다.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에 홀딱 반하게 된 한 문장이다.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는데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 떠안는다 하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마르크스에 맹목적인 거부감을 갖는 많은 분들에겐 이 말이 귀신 쉰 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누구인가? 철저한 유물론자이자 근현대를 통틀어 최고의 지성인 그가 대중을 미혹케 하는 말을 허투루 했을 리가 없다.

 

이 말은 신빙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우리 의식세계 속에 내면화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이 말이 등장하는 앞뒤 맥락을 위해하기 위해 [독일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 한 사회구성체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할 때까지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 물질적 존재조건이 낡은 사회구성체 내에서 완전히 부화할 때까지 종래의 것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떠안는다. <<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기본지식이 바탕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 이해하게끔 설명을 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진다. 마지막 한 문장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나는 처음 이 구절을 접했을 때 그 내용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떠안는다는 말이 위의 문맥상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그 말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이해했더라도, 그 예를 들지 못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과도 같다.

 

위의 문장과 관련하여, 당시 내 뇌리 속에서는 이를테면, 100년 전에 지구 바깥에서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지구를 강타했다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는데,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떠안는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해한다. 위의 문장에서 방점은 해결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떠안는다에 있다. ,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원시인에게는 운석 충돌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석 충돌이라는 문제가 인간에게 인식되기 시작하는 현대사회에서 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하다. 우주과학의 발달로 운석의 이동경로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제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떠안는다는 말을 교육에 적용해 보자. 인간 사회의 발전 법칙에 관한 이론체계인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이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둘 다 공통적으로 인간 발달을 다루기 때문이다. 비고츠키의 용어로, 전자는 계통발달(인류의 발달과정) 후자는 개체발달(개인 발달과정)과 관계있다.

 

아이의 성장과정에서 부모 혹은 교사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시기가 있다. ‘2으로 상징되는 사춘기 혹은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떠안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명심하면 부모나 교사는 이 문제를 현명하게 대처해갈 수 있다.

 

초딩이든 중딩이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부모를 힘들게 하는 징후엔 어떤 공통점이 있다. ‘반항이다.

 

그러면, 사춘기의 아이들이 왜 부모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데 부모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데 따른 반발심이 전부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강요해온 어떤 행동 수칙이나 가치관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세뇌교육을 받아 왔는데, 때론 밤늦도록 어떤 생각에 골몰하는 것이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적/정서적 성장에 따른 힘이 길러졌다는 징후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상물정 모르는 녀석의 치기어린 이유 없는 반항으로 간주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어른에게 반항하는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아이의 반항적인 경향성은 어린애 시절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획기적인 변화(transformation)가 아이 내면에서 용틀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획기적인 변화는 축복이다. 그것이 축복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고력의 발달이다.

 

어린 아이 시절에 아이는 논리적인 사고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만 한다. 말을 잘 들으니 부모의 입장에선 수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어린아이의 한계일 뿐이다. 그러던 아이가 그 사고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때 부모는 아이의 이런 변화를 불편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변화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향상된 사고력에 힘입어 아이와 높은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인간 대 인간의 협상테이블에 초대해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다.

 

요컨대, 아이가 반항하게 된 것도 또 그 반항심을 해소하기 위한 지적인 대화가 가능한 것도 모두 아이 내면의 성장으로 인한 것이다. , 이전에 없던 문제가 생겨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문제 해결의 가능성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다. 위기와 기회가 함께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떠안는다.

 

다음 글에서는, 초등 저학년 아이들과 소통할 때 이 말이 적용되는 맥락에 대해 논해 보겠다.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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