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학부모에게

배추흰나비 기르기

리틀윙 2019. 6. 3. 16:37

3학년 과학 공부의 하이라이트가 배추흰나비 기르기이다. 2017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으로 3학년을 담임하기 때문에 배추흰나비도 세 번째 만나게 된다.

 

20일 전에 배추흰나비 사육 세트가 교실로 배달되었는데, 펼쳐보니 상자가 너무 작다. 작년 도량초에서는 펼침 망 구조로 되어 있어서 생명체가 속에서 운신할 공간이 제법 여유가 있었는데, 올해 것은 양주 박스보다 약간 더 큰 모양새다.

 

손바닥만 한 화분에 심겨진 케일 잎 뒷면에 배추흰나비 알이 몇 개 붙어 있는 채로 배달되었는데, 며칠 뒤 알에서 애벌레가 나와 꿈틀거렸다. 애벌레 녀석이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저 사육상자 통을 제거해주자. 쟤들이 너무 답답해하지 않겠니?”

, 선생님. 그럼 쟤들이 도망가 버리잖아요?”

 

안 그럴 거야. 잘 생각해 보자. 배추흰나비는 알-애벌레-번데기-어른벌레로 변해 가는데, 알과 애벌레 상태에서는 절대 화분을 벗어나지 않아. 그리고 번데기 상태에선 움직이지 않으니 이때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 배추흰나비가 되었을 경우가 문제인데...... 우리 배추흰나비의 입장에서 잘 생각해보자. 알이나 애벌라라면 몰라도 나비가 저 좁은 곳에서 날개 짓을 할 수 있겠니? 너무 갑갑하고 슬프지 않을까? 설령 우리 몰래 도망간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인데, 8마리의 애벌레 가운데 몇 마리의 나비는 우리가 관찰할 기회가 있을 거야!”

 

나의 의도는 저 좁은 플라스틱 상자 대신 우리 교실 전체를 사육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감옥을 제거해도 저 나약한 생명은 달아나지 않는다. 케일 화분이 자기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비가 되어 달아나면 또 어떤가? 쟤들이 죄인도 아닌데 왜 갑갑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교육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윤리학)은 같이 가야 한다. 윤리적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이미 교육이 아니다. 탐구정신보다 생명존중정신이 백 배 더 중요하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데 며칠 걸리는가를 관찰하는 것보다 저 나약한 생명체의 입장에 서서 그 엄중한 실존적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게 당면한 공부의 가장 중요한 학습목표이어야 한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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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는 항상 리스크를 수반하는 법이다.  

플라스틱 케이지를 제거하니 애벌레들이 화분을 벗어나 교실바닥까지 내려와 꾸물꾸물 기어 다닌다. 애벌레에게는 케일이 자기 생명줄이기 때문에 화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말이 무색해졌다. 식욕이 왕성한 애벌레가 케일 잎을 뜯어 먹을 때는 자기 서식지를 벗어나지 않지만 번데기 되는 과정에서 화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돌발변수였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으면 곤란하지만 가끔씩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허점을 보이는 것도 교육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 교사도 미완의 학습자일 뿐이다. 가르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학생과 같이 배워가야 한다. 다만, 교사는 학생들보다는 성숙한 학습자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같이 길을 잃었을 때 지도자적 위치에 서서순간의 실패를 더 큰 배움을 위한 기회로 전환시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가 야기한 돌발변수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예상치 못한 값진 배움을 야기한 점에서 오히려 좋았다


아이들이 벌레와 친해졌다.  

화분에서 떨어져 나온 애벌레들을 다시 케일 잎 위에 올려주기 위해 몇몇 아이들이 애벌레를 손으로 만지는 용기를 발휘한 덕분에 아이들이 애벌레를 다시 보게 되었다. , 애벌레를 만져도 아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간접 체험한 주변 아이들이 직접 체험자인 친구에게 그 소감을 묻자, 그 아이는 하나도 안 무서워. 오히려 촉감이 보들보들한 게 귀여워!”라고 답한다. 이를 통해 애벌레를 향한 아이들의 기존 관념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한 아이의 영웅적인결기가 선한 영향력을 미쳐 제 2, 3의 직접 체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래가 또래를 학습시키는 이러한 전파성이야말로 아이들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교사는 아이들 특유의 이러한 집단심리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실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온라인 세미나에서 서울 계시는 중등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아이들(중고등학생)이 벌레를 엄청 무서워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벌레를 보면 기겁한다고 하는데, 나는 초등 아이들이 그런 것은 이해가 됐지만, 중등 아이들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어린 시절엔 농촌은 물론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집안에 벌레가 많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집안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한다. 벌레와 동거해본 적이 없으니, 벌레에 대한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부적응은 공포를 유발하고 공포심은 적개심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공포심과 적개심을 품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이를테면 조선일보) 몰라도, 막연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맹목성을 띠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한 맹목성은 다른 사물에 대해서도 전이될 것이기 때문에 조화로운 인격 형성에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 도시 출신보다 더 순박한 이유가 벌레를 비롯한 동식물을 가까이 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소가 자연이 최고의 교육환경이라 말한 것은 이런 뜻이리라! 자연을 영어로 nature라 하는데, 이 낱말은 천성혹은 본성이란 뜻도 있다. 자연과 멀어지면 인간 본성과도 멀어지는 것이다.

 

배추흰나비를 기를 것이라 예고했을 때 우리 아이들의 반응도 서울의 중등 학생들처럼 그러했다. “선생님, 저 벌레 싫어요. 무서워요!” 이런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화 [쥐라기 공원]의 한 장면을 이야기해줬다. 여성 공룡박사(로라 던)가 트리케라톱스의 병을 진단하기 위해 공룡 똥을 손으로 쥐고서 냄새를 맡는 장면 이야기를 하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탐구 대상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고.

 

나의 설득이 벌레에 대한 아이들의 공포심을 불식시키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벌레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는 최선은 벌레를 실물적으로경험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체험은 손으로 만져보는 것인데, 플라스틱 케이지를 해체함으로써 이 체험학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화분을 벗어나 어디론가 기어가는 애벌레를 아이들이 손으로 집어서 화분에 다시 넣어준 것 또한 우리의 무지(나의 무지)에 기인한다. 번데기 과정을 밟기 위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숨기 위해 화분을 벗어난 것인데, 처음에 나는 녀석들이 길 잃고 헤매는 줄로 알았다. 나는 과학적으로는 너무 무능했지만 철학적으로는 약간 유능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벌레를 가까이해 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이 경험은 나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크다. 유아기 때 벌레를 익숙하게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되면 벌레를 괴물 취급한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향해 품는 맹목적인 거부감이 사회생활에서 사람에 대한 기피증으로 연결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 배추흰나비 관찰학습을 통해 내가 길어 올린 통찰이다.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김대중 정부 때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고 쓴 기행문의 제목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사실, 50대인 우리 또래들도 그렇고 태극기 할배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 각인되어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다. 남한 사람이 북한 사람을, 백인이 흑인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향해 막연한 경계심을 품는 것이 모두 가까이에서 접해보지 못한 물리적 체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뜻한 체온으로 대상을 물리적으로(physically, 신체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하면 대상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품기 마련이다. 존 레넌이 사랑은 물리적 접촉Love is touch, touch is love”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