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전교조를 위하여

리틀윙 2018. 7. 12. 13:52

 

노동절이다.

교사도 노동잔데, 교직생활 31년 만에 처음으로 노동절에 쉬어 본다. 학교에서 재량휴업일로 지정해서 아이들도 나도 임시 휴일을 즐기고 있다.

 

교사도 노동자다.

29년 전에 전교조가 이 자명한 주장을 외치고 노동조합의 깃발을 내걸다가 1,500명의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나고 전교조는 불법단체가 되었다. 그 뒤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전교조가 합법화되었지만, 박근혜 정부 때 다시 법외노조로 밀려나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독재정권에 의한 부당한 대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최근 젊은 교사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이다. 전교조 조합원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탈퇴자 수가 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교조 결성 당시 이삼십 대였던 교사들이 지금 한창 명예퇴직을 하고 있는데, 자연 감소에 비해 젊은 교사들의 가입률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이다. 말하자면,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가 젊은 교사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를 흔히 전교조 내부의 문제로 포커스를 맞추곤 한다. 이건 올바른 인식론이 아니다. 모든 문제의 배경에는 주관적 요인(subjectivity, 주체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objectivity)이 맞물려 있다. 전교조 문제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말하는 주관적 요인이란 전교조 자체의 문제를 말하고 객관적 요인이란 주관적 요인 외의 모든 문제를 말한다.

 

# 주관적 요인

전교조의 퇴조 현상에 대한 주관적 요인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필요 없으리 만큼 많은 분들이 인식하는 그대로가 사실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이에 관해 지금까지 전교조게시판이나 이곳 페이스북에서 나만큼 전교조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비판 혹은 비난해 온 논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 어느 시점 이후 나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교육 영역 내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이런 저런 신생 단체에 몸을 담고 경험한 나의 결론은 그래도 전교조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절제하겠다.

 

 

# 객관적 요인

객관적 요인 가운데, 주류 언론에 의한 전교조의 왜곡된 평가가 대중에게 전해져 전교조가 국민대중의 신뢰를 상실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보수언론에 의해 전교조는 종북주의자들이 이끄는 위험한 교직단체로 각인되어 있다. 전교조 내부의 활동가 가운데 이를테면 종북주의자들로 규정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극소수에 해당하며 그 영향력이 미미할 뿐이다. 어떤 신념에 입각하여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 집단에서 이런 저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교조 교사들의 사상을 구성하는 정상분포곡선에서 특정한 일부분을 추출하여 그것을 전교조의 보편 정체성으로 부각하는 것은 구시대 보수언론의 악의적인 수법일 뿐이다.

 

전교조가 젊은 교사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젊은 교사들 자체의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교조가 만들어질 당시에 비해 지금의 교단은 엄청난 변화를 보이는 점이다. 쉽게 말해, 그 시절엔 전교조가 꼭 필요했고 지금은 전교조가 별로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역설적으로, 전교조의 활약으로 전교조가 필요 없는 교단이 된 것이다. 관련하여, 5월 중순에 출간된 나의 책 [학교를 말한다]의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 어떤 면에서, 전교조가 추락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전교조가 자기 역할을 할 만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육운동의 구심으로서 전교조는 당대의 학교를 혁신하기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촌지 안 받기 운동이나 고교평준화, 무상급식, 교복공동구매 등 지금은 상식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전교조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학교는 교장이라는 절대권력자가 지배하는 개인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학교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은 전교조의 공이 크다. 사실, 우리 때와 달리 요즘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잘 안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전교조가 학교를 많이 바꿔 놨기 때문이다. 반면, 교육운동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없는 평범한 사오십대 교사들이 전교조에 끝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전교조가 학교 혁신에 끼친 공로를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의 발로에서이다. <<

 

 

두 번째의 원인은 민감한 문제여서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기가 어렵다. 지성적인 토론을 위해 솔직한 어법으로 적자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우경화된 경향성 탓이 크다. 그렇다고 젊은 교사들이 싸가지가 없다거나 하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저 객관적인 형편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시대의 인간일 뿐이다. 젊은 교사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이유가 전부다.

 

사실, 젊은이들의 정신세계가 보수화된 것은 비단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파울루 프레이리 책에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 우리 시대 진보적 교육사상의 아이콘이라 할 프레이리가 북미의 대학에서 강연을 하거나 하면 우경 학생들이 이를테면 좌파 꼰대 학자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199752일에 우리 곁을 떠났다(내일이 프레이리 19주기이다). 따라서 위의 풍경은 최소 20년 전의 상황인 것이다. 이러니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으로 뽑혀 국정을 망쳐가고 잊을 만하면 대형 총기사고가 벌어져도 미국사회에서는 촛불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정치상황이 불안한 라틴 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몰라도,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그나마 진보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세계 정세를 감안할 때 우리 한국의 청년들이 딱히 보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든 걸 떠나 젊은이들이 사회모순에 무감각하고 덜 추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연대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태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책임지는 교사들이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것이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하면 꼰대적 발상인 것일까?

 

작년 초까지만 해도 나는 전교조스러운교사들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나의 용어로 좌경종파패거리라 일컬은 분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벌떡교사든 좌경종파주의자들이든 차라리 이런 분들이 아쉽기만 하다.

 

전교조가 태동한 ‘1987’과 달리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왔지만, 사회적 불행 지수는 오히려 심화되어 있다. 국가 전체 경제 수준은 상승했지만 빈부의 차이는 커져만 가고 우리가 가르치는 제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현실이다. 교육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정의의 본질은 정의로운 나눔이다. 합리적인 나눔은 합리적인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늘 노동절을 맞아 우리 교사들이 노동의 의미를 새삼 새겨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메이데이가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로 통용되는 사회다.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말하면 빨갱이 선생 소리 듣는 사회다. 세계가 주목하는 훌륭한 리더십의 소유자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에서 개정헌법에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려 하자 기득권 세력이 사회주의 헌법이니 하며 흥분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선진 사회에서는 상식으로 자리한 가치관이 우리에겐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보다 독재정권 시절에 극우적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학교교육의 탓이 크다. 그나마 ‘1987’ 시절에는 대학에서 청년들이 프락시스를 통해 초중고에서 세뇌 받은 거짓교육의 한계를 극복해갔지만 지금 대학교에서는 “(세계가 경탄해마지 않는) 남북정상회담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고 있으니 참담할 따름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교사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가가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교사에게 진보적 마인드는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다.

이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부디 전교조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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