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사람과 구조

리틀윙 2018. 11. 16. 08:35

(여름방학 끝나고 오랜 만에 마을도서관에 왔다.)

 

폭염이 계속되던 방학 때와 달리 지금은 빈자리가 많다. 그래서인지 12석을 차지하는 사례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이제는 이 풍속도에 적응이 돼서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좋게 이해하면, 문제의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측면에 있는 듯하다. 테이블의 폭이 좁아서 한 사람이 앉기엔 조금 부족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예전에 내가 훈계(?)했던 청년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 청년이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구조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의 양 측면을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성이 보수이고 구조에서 찾으려는 경향성이 진보라 보면 대충 맞아 떨어진다. 예전에는 이 인식론을 신봉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람은 구조 속의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 있는 구조 속에서는 문제 있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열람실의 청년들 사이에 만연한 개인주의 풍조도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가 빚은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불량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연대해서 정치 투쟁을 벌여가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구조 탓으로 돌리면 곤란하다. 나쁜 구조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나쁜 구조를 바꾸는 것도 사람이다. 우리 교육이 당면한 모든 문제는 입시지옥이라는 불량 구조로 귀결된다. 때문에 흔히들 이 구조를 바꾸기 전에는 교육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런 사고의 맹점은, 구조적 모순에만 천착하여 개별 주체의 노력을 경시하는 태도다.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시스템은 너무 공고해서 단기간에 해결이 가능한 게 아니다. 최근 입시 문제를 건드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교육부장관이 경질된 것이 좋은 방증이다. 교육부의 수장도 해결 못하는 것을 누가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구조적 모순을 따지자면 입시제도가 모순의 근본은 아니다. 그 배후에 있는 진정한 근본 모순은 자본주의경제의 모순이다. 치열한 경쟁교육이 치열한 생존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은 그리 복잡한 사고를 요하지 않는 상식이다. 입시제도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경우 허무주의로 흐른다.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허무주의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기.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실현가능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현 단계에서 내가(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한 효율적인 전략/전술을 고민해야 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면 언젠가 구조는 바뀐다.

 

실현가능한 비전은 통합적 시각이라는 지적 프레임을 필요로 한다.

 

개인-구조, 미시-거시, -질 등 일련의 대립적인 두 속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물이 섭씨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바뀌듯, 아무리 공고한 것도 일정한 조건이 되면 변한다. 물이 액체상태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은 질적 변화(transformation).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에 말미암는다. 개별 주체들이 자기 자리에서 노력해서 양적 변화를 좇다 보면 언젠가 이 사회에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천년만년 해먹을 것 같았던 새누리당을 궤멸시키고 이명박-박근혜를 감방으로 보낸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도 그간에 우리가 노력한 양적 변화로 가능했다.

 

 내가 볼 때, 이 비이성적인 교육 모순도 질적 변화가 임박했다. 나는 이번 초등저학년 오후3시 하교정책이 제안되는 현실에서 그러한 변화의 한 징후를 본다. 입시제도의 질곡이 경제모순에서 기인하듯이, 교육 영역 변화는 필연적으로 경제 영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교육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사회 모순, 특히 경제 모순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모순의 근본은 구조적 문제에 있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바뀐다는 사람들보다, “교사는 자기 교실에서 아이들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과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

 

이 각각의 대립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중시하고 다른 하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과 구조 가운데 뭐가 더 중요하냐고 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면, 지금 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답하겠다. 그 이유는... 잘못된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은 오직 사람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열람실 자리 문제로 돌아가 보자.

좌석 배치의 구조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11석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도 많다(주로 여성들이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소박한 생활 자세다. 이런 사람들이 희망이다. 이런 사람들이 침묵하면 별 희망이 없다. 선량함 자체로 희망을 견인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선량한 사람들이 분노하고 오지랖을 발동할 때 세상은 바뀐다.

 

나의 젊은 시절과 달리 요즘 학교가 재미없는 이유도 분노와 오지랖이 실종되고 없는 것이다. 요즘 젊은 교사들, 총명해서인지 일을 정말 잘 한다. 아이들도 열심히 가르친다. 그런데 아래 사진과 같은 오지랖을 잘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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