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경상도 아재

리틀윙 2019. 3. 27. 12:55

 

몇 해 전에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을 때의 일이다. 아파트 일로 어떤 여성분과 긴밀한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나보다 서너 살이 많은 이 분은 우리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진보적인인텔리 여성이다. 내가 이 분을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뽑힌 대선 때 문재인 선거운동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구미에서 민주당 지지자는 서울에서 정의당 지지자와도 같다. 이 분이 자치회 회의에서 발언을 하면 뭇 남성들을 압도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이 나와 한창 대화를 나누다가 시계를 보더니 급한 일로 잠시 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하신다. 그 급한 일은 다름 아닌, 신랑 밥 챙겨주는 일이었다!

 

그 한마디로 이 분에 대한 나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다고 실망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가 잔 다르크에서 신사임당으로 바뀐 정도이다. 이것은 사람의 한계가 아닌 시대의 한계다. 그 세대에선 아무리 대단한 여성도 가부장질서의 굴레를 스스로 못 벗어나는 것이다.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난다. 그래서 이 분의 그 말이 내게 충격과 함께 어떤 위로를 안겨다주기도 했다. 같은 세대의 경상도 아재로서 나는 그나마 덜 나쁜남편이라는 자긍심 같은 걸 느꼈으니 말이다.

 

며칠 전에 아내가 발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 그래서 연일 가사노동에 몰입하느라 죽을 지경이다. 평소 같으면 도서관에 가서 유유자적 선비의 품위를 누릴 일이건만 오늘 하루 종일 설거지에 밀린 빨래하느라 식겁하겠다.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경상도 아재들은 인간 안 된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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