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수업에 대한 고민

리틀윙 2019. 3. 27. 12:58

최근에 와서 깨닫는다.

내가 게으름을 피울 때 아이들이 더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설명을 많이 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까 고민하며 좋은 설명 전략을 연구했다.

그런 나의 방식에 호응하고 잘 따라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전자는 똑똑한 소수, 후자는 그렇지 않은 다수다.

 

열심히 가르치면 잘 가르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교사의 적극성은 필연적으로 학생의 소극성을 초래한다.

주어진 40분의 수업시간은 교사활동(교수teaching)과 학생활동(학습learning)의 비례배분이다.

전자가 많을수록 후자는 적어진다. 전자가 화려한 위용을 뽐낼수록 후자는 왜소하고 초라해진다.

 

교사가 잘 가르치면 학생이 잘 배우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진정한 배움은 이해할 때보다 사고할 때 일어난다.

사고는 교사의 설명을 들을 때보다 학생 스스로 말을 할 때 활발히 이루어진다. 특히 미성숙한 아이들은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한다(비고츠키). 따라서 아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생각을 차단하는 것과도 같다.

 

아이들 스스로 말을 많이 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끼리 부대끼도록 해야 한다. 교사 앞에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도 자기네들끼리는 입을 잘 연다.

 

영상은 옛날과 오늘날의 주거형태가 어떻게 달라졌나?”라는 학습과제를 모둠끼리 해결해가는 모습이다. 아이들끼리 말하게 하면 단 한 명의 아이도 수업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돌아가면서 말을 하기 때문에 학습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고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만약 이 수업을 교사 주도의 설명으로 진행한다면 극소수의 아이들에게만 배움이 일어날 것이며 대다수는 몰입과 이탈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최고의 선생은 아이다.

큰 나무 밑에서 작은 묘목이 시들어가듯, 부지런한 교사 밑에서 아이들은 잘 성장하지 못한다.

 

교사는 게을러져야 한다.

단 게으름이 방임 혹은 무책임을 뜻하진 않는다.

교사의 안테나는 아이들을 향해 있어야 한다. 늘 학생집단을 예의주시하되, 예의주시하는 걸 아이들이 못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 중요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야 날기 시작한다더니.

 

사족) 교과에 따라, 학습주제에 따라, 차시에 따라 교사의 설명이 요긴할 때도 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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