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리틀윙 2018. 7. 12. 12:28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흔히 교육을 전문직이라 합니다. 교사에게 전문성은 생명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교사의 전문성은 교육이론에 의해 뒷받침 됩니다. 교육을 뒷받침하는 기초 이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

 

저는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학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학교가 사회 속에서 기능하는 까닭에 사회가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면 학교와 학교교육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의 학교교육에 종사하는 사람(=교육자)은 자본주의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위력적인 이론체계는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교사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섭렵하는 것은 필수적인 자질이자 의무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시각으로 교육 현상에 대해 접근하려는 *** 선생님의 치열한 자세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론은 언제나 현실 속의 이론입니다. 이론의 정합성은 현실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구체적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2세기 전의 인물이지만 자본주의사회를 설명하는 그의 이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신이 아닌 이상 그의 사상체계가 완전무결할 수는 없죠.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모습으로 검증되고 발견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회 모든 영역에서 보편타당한 이론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관념체계인 이론 또한 그에 맞춰 부단한 자기혁신을 꾀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 후학들에 의해 계속 수정 보완되어 왔습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위대한 맑시스트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선진산업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유럽에서 후진 사회였던 러시아와 반봉건사회에 머물러 있었던 중국에서 일어났던 것에 대해 헤게모니론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교육에 관한 의미 있는 담론을 가장 많이 생산한 사상가라는 점에서 진보적인 교육자들이 필히 섭렵해야 할 공부거리입니다.

 

그람시처럼 혁명적 실천을 한 적도 없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와는 약간 결이 다른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비판이론은 자본주의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지만 중요한 지점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생각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해 해방세상이 도래할 것이라 보지 않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혁명 역량을 너무 과신했다고 봤습니다.

 

그람시 이론과 비판이론을 비롯한 서구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공통점은 스탈린주의로 상징되는 기존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과오가 비물질(=정신)적인 부분에 비해 물질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하부구조 못잖은 상부구조의 중요성(=상대적 자율성)에 주목하였는데, 이는 우리 교육진영의 담지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함의합니다. 교육이 상부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는 전교조의 세가 강할 때(전교조 합법화 이전보다 이후에) 오히려 교육운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역설적 이치를 개량이라는 한 낱말로 간단히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개량이 일어나는 인과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고치려면 문제가 생겨난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하겠죠.

 

노동계급, 교사대중의 몰지각과 낮은 의식을 탓하겠습니까? 그러는 운동 지도층은 과연 의식이 선진되어 있던가요? 전혀 아닙니다. 혁명운동의 대부라 할 레닌이 혁명이론 없는 혁명실천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했거늘, 운동 대오에 몸을 던지는 분들 가운데 지적 단련에 힘쓰는 분들을 잘 보기 어려운 것이 우리 운동판의 현주소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을 달면, 바로 이런 이유로 제가 전교조 운동판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전교조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대안 운동세력에 관여하며 그곳 활동가들과 교류를 했습니다만, 전교조의 비민주성을 비난하는 이들이 전교조보다 훨씬 비민주적이며, 대중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경향성이 더 심한 것을 보면서 전교조만한 조직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교조나 전교조를 비난하는 군소 운동조직들 둘 다 싸가지와 지성이 빈곤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전교조는 천민자본주의헬조선의 피억압 민중과 그의 자녀들의 편에 서서 인간해방을 꿈꾸는 영혼 있는 교육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에 제가 품었던 전교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결론은, 전교조 교사로서 덜 못난 전교조를 만들기 위해 내 할 일이 뭔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부분(생산력, 생산관계 / 교육제도, 승진시스템, 전교조합법화 등) 외에 비물질적인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학교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교사가 노동자인 것은 맞지만, 교육영역에서 노동자의 대립물인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용자라는 이름으로 단체교섭 때 우리가 교육감을 마주합니다만, 교육감은 자본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이론의 핵심인 잉여가치가 교육노동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근로조건의 문제든 교육실천의 문제든 참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살리고 백년지대계라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의 진보를 선과 악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자는 것은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아래 덧글 링크)

 

제가 어제 글에서 말한 예의운운은 쉽게 말해 (강준만의) ‘싸가지론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께서 운동논리를 강조하시는 입장과 조금 다릅니다. 저는 옳은 말이 옳으려면 상황 속에서 옳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를테면, 대화 도중에 상대방의 이빨에 고춧가루가 묻었다고 그것을 정확히 지적해 주는 것이 과연 옳은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방금 떠오른 개념인데, 저는 이것을 맥락적 옳음 contextual righteousness’이라 일컫겠습니다.

 

맥락적 옳음을 결정하는 것은 대중입니다. 이른바 벌떡교사라는 분들이 교무회의 때 교사대중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이런 오류를 흔히 범합니다. 고백컨대, 10년 전의 제 모습입니다. 벌떡 일어서는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저도 작년에 한 번 일어서서 말을 했습니다. ‘벌떡일어서진 않았고 차분히 일어서서 최대한 정중히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저는 교사대중으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이 말을 꼭 해야겠다 싶어서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의 모든 교사가 제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던 10년 전과 완승을 거둔 작년의 차이는 싸가지(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변화된 싸가지의 기저에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작은 차이에 대한 수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다 존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조리한 집단 분위기에 편승할 바에야 차라리 왕따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또 젊은 교사들의 정서를 최대한 고려하더라도 운동조직으로서 전교조는 나름의 원칙을 견지하며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합니다. 사실, 국정농단세력이 자행한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촛불민주주의로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정부가 바로 잡으려는 성의를 안 보이는 것은 적폐의 연장입니다. 이에 대한 항의로 지도부가 삭발단식투쟁을 감행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문재인정부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전교조집행부도 이런 점을 계산하고 계실 겁니다. 피차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연출하고 있다고 봅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으되 아직 여전히 어둡고 추운 겨울입니다. 우리 교육현실이 그러하고 교육운동의 전망이 이러합니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혼탁한 시대일수록 원칙을 견지해야 합니다. 계속 제자리만 맴도는 듯한 꼬불꼬불한 길 속에 있더라도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육자나 교육운동가가 의지할 나침반은 이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침반을 신뢰하는 것은 좌우로 떨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와 함께 그 대립물인 막스 베버나 뒤르껭도 가까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내의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을 섭렵해 갔으면 합니다.

 

끝으로, 이론은 치열하게 파고 들되 실천은 유연하게 합시다. 제가 어제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겁니다. 나와 약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이런 의미로 제가 좋아하는 경구로 글을 맺겠습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201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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