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살이-1

3학년 아이들이 딱 내 수준에 맞다

리틀윙 2018. 1. 26. 15:58

한 순간만 긴장을 풀어도 이내 산만해져 수업 분위기가 무너지는 통에 수시로 박수 세 번!” 따위를 연발해야 하는 교실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5분 이상 정숙을 유지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시험지 풀 때다. 기말 시험은 물론이고 평소 학습지를 나눠 주면 다 풀 때까지 교실 분위기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리 재미있지도 않은 이 일에 아이들은 왜 혼신을 힘을 다하는 것일까? 수업시간 내내 먼 산을 보거나 딴전을 피우는 아이들도 시험지에는 거의 맹목적 충성을 보인다.

 

둘째,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해주면 온 귀와 눈을 열고 쫙 빨려온다.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수업 주제와 관계있는 이야기인데도 아이들은 교사의 이야기에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다. 현행 교육과정은 피아제의 구성주의를 근간으로 짜여져 대부분의 학습활동이 아동 스스로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해가는 식이다. 그런데 교과서가 서울 강남 아이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져 우리 아이들은 엄두를 못내는 과업이 많다. 이러한 여건들로 미루어 3학년 교실에서는 교사 위주의 설명식 수업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셋째, 동영상 틀어 주면 눈이 뚫어지게 모니터 화면을 바라본다. 처음에 나는 이 현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 수업 시간에는 산만한 아이들이 영상 매체에 각별한 집중력을 보이는 것이 어릴 때 스마트폰 따위의 기기에 너무 많이 노출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산만한 아이들이 고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것은 비단 영상뿐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 이 글의 핵심이다.

 

이 외에도 아이들은 노래나 게임을 배울 때 정말 열심히 참여한다. 이 아이들은 신나는 노래에는 거의 광분하다시피 하고, 감동적인 노래에서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의 진지함을 보인다.

 

사실, 노래와 게임, 동영상, 교사의 이야기, 학습지 등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것은 비단 3학년 뿐만 아니라 고학년 아이들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학년 아이들이 빠져 드는 정도는 4학년 이상의 아이들과는 현격히 다르다.

 

순진무구함.

지금까지 논한 3학년 아이들 특유의 기이한 행동 특성은 순진무구함에서 연유한다. 올 한 해 30년 내 교직생애 최악의 교실에서 악전고투 끝에 내가 얻은 소중한 통찰이다. 교사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아이들이 한편으론 그렇게 사랑스럽기도 한 이 분열적인 속성이 순진무구함으로 설명이 된다. 일상적 어법으로 순진무구해서이고, 비고츠키의 개념으로 정신과정(mental process)의 미숙함때문이다.교사를 힘들게 하는 저학년 아이들의 행동특성은 악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착해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초등학생 보다는 대학생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도 고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한다. 아니다. 예전에 대학교에 강의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대학생들보다 초등학생 가르치는 게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다는 것이다. 순진무구의 측면에서 대학생은 초등학생들을 따라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에서도 고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면 수준 높은 강의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 반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못 받을 것 같다.

 

외람되지만, 내가 대학생보다는 초등학생, 고학년보다는 저학년 아이들이 더 잘 맞는 이유는 나도 순진무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외외로 순진한 구석이 많다. 사람을 잘 믿어 잘 속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배신감과 상처도 잘 받으며, 반대로 순수한 사람들에겐 내 것을 많이 주는 편이다. 이 아이들이 그러하다. 이 아이들은 내가 조금만 잘 해줘도 고마워하며 더 큰 정으로 보답하기 위해 성의를 보이며 나를 감동시킨다.

 

요즘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도 되냐고 묻는 아이는 없다. 그래도 아직도 계속 물어 오는 것이 있다. 손톱만한 색종이 찢어진 것을 폐휴지함에 분리수거해야 하는지 쓰레기봉투에 바로 버리는지 꼬박꼬박 묻는다. 귀찮을 정도지만 한편으론 녹색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이런 사소한 일에조차 신경을 쓰는 아이들이 너무 대견스럽다. 3월초에 얘기해 준 북극곰의 비애를 지금도 아이들은 생생히 기억한다. 순진한 아이들은 교사가 소중히 품는 가치를 그대로 내면화하고 가소성이 강해서 자신의 뇌리에 새긴 가치관을 평생 가져갈 것이다.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학습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교육의 효과도 높고 그만큼 교사 역할의 중요성과 책무성도 커진다. 수준 높은 교육자는 강단에 서야하고 유치원 선생은 아무나 해도 된다는 사고처럼 교육적으로 씁쓸한 망상도 없다. 내가 역량 있는 교사라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저학년 교실이다. 1학년은 도저히 자신이 없고 3학년이 딱 내 수준에 맞다.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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