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리좀과 사회운동

리틀윙 2017. 4. 4. 07:39

리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1)접속의 원리 : 리좀은 어떠한 점과도 접속될 수 있고 또 접속되어야 한다.
2)이질성의 원리 : 리좀은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허용한다.
3)다양성의 원리 : 리좀에서는 차이가 차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차이가 어떤 하나의 중심, 일자(一者)로 포섭되거나 동일화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운동집단은 이 리좀의 특성과 정반대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운동집단이라 할 수도 없지만) 태극기집회에서 우파들은 기자들을 향해 증오심을 표출하는가 하면 태극기를 들지 않는 사람들을 좌파로 규정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최소한의 양식(良識)이 있다면 최순실과 박근혜의 연관성을 인지할 것이지만, 이들에게 박근혜는 좌파세력의 음모에 의해 쫓겨난 비운의 여제이다.

이들의 이러한 비지성적 태도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책가방 끈길이와 관계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김진태는 서울대법대, 김평우는 하버드를 나온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나는 우파들의 꼴통 행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리좀의 제1원리인 ‘접속’의 부재, 즉 단절과 고립에 있다고 본다.

특히 경상도 벗들 가운데 작금의 탄핵 정국에서 설을 쇠면서 부모형제들의 빗나간 우국충절에 갑갑함을 느낀 분들이 많을 것이다. 평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정치적 식견이 우리와 엄청나게 동떨어져 있는 것을 목도하고선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느꼈을 것이다. 그 분들 생활 속에선 다 선량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삶의 바운더리는 예외 없이 닫혀 있을 것이다. 거의 한 평생을 비슷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할 뿐 이질집단과 접속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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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진보를 참칭하는 집단의 경우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1) 자기 울타리를 넘어 낯선 무엇과 적극적으로 접속하려거나
2) 이질적인 집단(즉, 보수적인 사람들)과의 접속을 시도하거나
3) 차이를 인정하며, 포섭이 아닌 수평적인 연대를 꾀하려는 좌파들을 잘 보지 못했다.
이런 자들이 내가 말하는 ‘종파패거리들sectarianists’이다.

종파패거리가 아닌 건강한 활동가들도 많다. 특히 교사집단(전교조)에 많다. 위의 리좀의 세 원리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충실한 분들은 훌륭한 활동가들이다. 좌경종파패거리들이 조직을 그렇게 말아 먹어도 전교조가 지금까지 버텨 오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이런 분들에 힘입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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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이질적인 집단끼리의 리좀적 접속을 통해서이다. 이를테면,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서로 아전인수격의 자기정통성을 고집한다면 세상은 발전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접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즉, 어제 우리가 추악한 적으로 간주한 세력에 대해서도 접속을 시도해야 하느냐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손석희가 좋은 예이다.
박근혜정부 원년(2013) 손석희가 MBC를 떠나 jtbc로 향할 때 많은 진보들은 ‘변절’로 규정했다. 그러나 지금 그 결과를 보라. 손석희가 없었으면 박근혜를 퇴진시켰을까 싶지 않다.
물론, 접속을 가장한 변절도 있을 수 있다. 자기정체성을 버리면서 이질집단에 투항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화되는 것이지 접속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시대상황에 따라 독야청청 전술이 바람직할 수도 있고 유연한 접속이 요구되는 때도 있다. 현금의 상황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 지금은 독립운동 하듯이 사회운동(교육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운동판을 이끌고 있는 종파패거리들은 독립운동 하듯이 조직을 이끌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페북 메시지가 날아든다. 내가 신뢰하는 정말 괜찮은 전교조 활동가 선생님이신데, 현장정서에 아랑곳없이 강경투쟁을 일삼는 좌경종파패거리 지도부에 염증을 느낀다고, 전교조 때문에 전교조가 싫어진다고 하신다. 이 분의 비애에 같이 분노를 느껴 이 글의 기조도 종파패거리들에 대한 비판으로 살짝 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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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의 종파패거리들이 80년대 정서에서 답보하고 있을 때, 세상은 엄청 변했다. 특히 진보교육감 시대에 접어들면서 진보와 보수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한때 전교조 연수에서만 유통되던 프로젝트 수업 따위가 보수지역의 제도권 연수에서 배치되는가 하면 전교조의 유명 강사들이 제도권 연수원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작년까지 내가 근무했던 다부초는 관리자들 세계에서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창조학교로 지정된 구미의 한 초등학교에서 내게 ‘다모임’에 관한 연수 요청이 들어 왔다. 속으로 엄청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보수 경북지역의 교육부 지정학교에서 다부초를 거쳐 간 전교조 교사에게 강의를 요청해 오는,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이질적인 접속’으로서의 리좀 정신의 구현이다. 종파패거리들은 인정 안 하겠지만, 내가 볼 때 요즘은 보수가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다.

리좀과는 거리가 먼 운동판의 “순혈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진보 운동은 선이 악을 물리치는 선악이분법 놀음이 아니다. 선량한 보수, 악한 진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세상이 선한 측면과 악한 측면 사이의 모순과 대립으로 발전한다는 사고방식은 마르크스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봉건사회의 신분질서를 타파한 자본주의 계급은 결코 선하지 않았지만 진보였다.
진보란 혁신적인 것이 낡은 것을 밀어내는 인간의지의 실현이다. 이런 면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에도 밀려나야 할 낡은 것들이 늘려 있다. 자신과 다른 이질집단과의 접속은 거부하며,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구시대의 낡은 정서에 젖어 나홀로 독야청청의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집단은 그 자체로 진보가 아니다.


201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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