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근면성실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리틀윙 2017. 2. 27. 11:22

 

# 아이를 사랑하는 학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블랙코미디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11월쯤이면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도 이 시기에 아이들은 감기몸살로 결석하곤 한다. 그런데 간혹 감기몸살로 불덩어리 같은 몸을 이끌고 억지로 학교에 오는 아이를 보게 된다. 10년 전에 도시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교실에 도착했는데 교실 앞 복도에서 한 아이와 아이 어머니가 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기몸살로 오늘 하루 학교를 쉬겠다는 말을 하러 왔다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갈 일이지 왜 학교에 오냐고? 이 불덩어리 같은 몸을 이끌고 추운 복도에서 벌벌 떨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물론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인과관계에 대해 잘 안다. 결석 대신 조퇴 처리를 맡기 위해 온 것이다. 아마 형편상 최대한 빠른 시간에 담임교사와 접촉하여 조퇴를 맡은 뒤에 아침 일찍 병원에 가야만 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몰상식하고 괴상망측한 사태의 근본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귀하디 귀한 자식이 감기몸살에 걸렸는데 추운 복도에서 떨게 하면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자녀에게 무심한 이른바 결손가정의 부모라면 이러지 않는다. 반대로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고 자녀의 미래에 걱정이 많은 부모가 이러는 것이다. 남들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가 감기몸살 걸린 자식의 건강이 악화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추운 복도에서 벌벌 떨게 하는 것은 생기부(생활기록부) 상에 개근이라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다.

 

학년말에 개근을 받으면 뭐가 좋아지는 것일까? 아무 것도 없다. 예전엔 하다못해 개근상이라는 상장과 공책 한 권이라도 받지만, 요즘 학교는 오직 생기부에 개근이라는 두 글자가 적히는 것밖에 없다. 그럼에도 학생/학부모가 개근에 집착하는 괴상망측한 심리의 저변에 있는 무엇을 나는 모범생 콤플렉스라 일컫겠다. 우리 사회에서 학창시절 개근이라는 두 글자는 근면성실의 증표로 통한다. 초등학교는 몰라도 이를테면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개근은 학생 취업과 관련하여 학생 자질을 가늠하는 중대한 판단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할 때, ‘존재물적 조건’, 더 쉬운 말로 경제 조건’, 더더욱 쉬운 말로 먹고 살기 위한 조건을 의미한다. 우리는 방금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가 자녀를 학대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는 인과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멀쩡한 학부모가 몰상식한 아동학대를 감행하는 심리의 저변엔 모범생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훌륭한 품성의 소유자로 기르려는 것이 아니라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살게 하기위한 소시민적 이기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탓할 순 없다. 현실적으로, 비록 아픈 몸이 더 악화될 지라도 개근을 향한 의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박한 조건으로 작용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 지배계급의 정신이 시대의 지배적인 정신이다

 

개인의 물적 조건이 개인의 의식 정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 전체의 의식 또한 사회의 물적 조건에 말미암을 것은 당연하다. 사회 전체 구성원들 사이에 만연한 의식의 총합은 가치관이나 양심 따위의 도덕관념을 구성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와 유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느 시대든 지배계급의 정신이 지배적인 정신이다.

The ideas of the ruling class are in every epoch the ruling ideas.

 

위의 문장에서 어느 시대든이란 어구에 주목을 해야 한다. 우리는 도덕관념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불변의 가치체계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익숙해 있다. 이와 관련한 한 실감나는 예로 내 블로그에 쓴 글을 인용해 보겠다.

 

>> 어떤 인류학자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 들어갔다. 그 부족은 가부장제가 아주 심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산 채로 남편과 함께 땅 속에 들어가 남편 수발을 해야 했다. 인류학자의 눈에 이것이 불합리한 것은 당연했고, 엉뚱하게 죽음을 앞둔 어떤 부인을 설득하였다. 생매장을 달갑게 맞이할 사람 어디 있겠는가? 그 여인은 문명세계에서 건너온 인류학자의 합리론에 수긍을 하여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인류학자는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자고 일어나니 여인이 사라진 것이다. 여인은 자신이 머무른 자리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담은 쪽지를 남겼다.

호의는 고맙지만, 양심의 가책을 못 견뎌 나는 나의 부족으로 돌아갑니다! <<

 

남성이 지배하는(ruling) 사회(인류의 모든 역사가 이러하다. 엥겔스 따위가 말하는 여성 지배의 모계사회의 실증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에선 가부장적 성역할 의식이 지배적인 정신이 된다. 비단 위의 미개한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의 한국사회도 그러하다. 그 단적인 예로, 여성흡연자가 뒷골목에 짱박혀 담배를 피워대는 현실을 생각하면 된다.

 

박정희 시대에 양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천하에 몹쓸 매국노 취급 받았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제차 모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이러한 극적인 인식 전환은 각각 우루과이라운드와 한미FTA라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양담배와 수입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해 농가 경제는 무너졌지만 자동차 수출 등을 통해 재벌기업은 큰 이익을 보았다. 지배계급(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국산품애용=애국, 수입품선호=매국이라는 기존의 지배적인 국민정서를 확 바꿔 놓은 것이다.

 

다시, ‘개근과 관련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모범생 콤플렉스는 근면성실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국산품애용=애국이라는 집단의식과 달리 이 부분은 시공을 초월하여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생각될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인간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게으름의 미학을 신봉하는 폴 라파르그(프랑스의 사회주의자로 마르크스의 사위로 유명한)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인간은 하루에 평균 3시간의 노동을 했다. 조선시대까지 농촌경제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그리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개근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벗이 멀리서 찾아와 술을 거하게 한잔 할 일이 있으면 다음 날 일터(논밭)에 나가지 않더라도 게으르다거나 불성실하다거나 하는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던 것이 자본주의사회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물질적으로 그리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자기 노동의 주체가 되어 노동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던 농부와 달리 노동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한 임금노동자는 일하기 싫을 때나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도 무조건 일터로 향해야 한다. 이런 시대의 물적 조건(=존재)이 근면성실이라는 시대정신(=의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신생new-born” 가치관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가운데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기몸살이 엄습하여 몸이 불덩어리인 학생이 복도에서 벌벌 떨며 담임교사를 기다리는 것이 학생 자신을 위한 의지의 발동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이 해괴망측한 집단심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간파할 것이다. 이에 관해 매우 정교한 설명은 보울즈(S. Bowles)와 긴티스(H. Gintis)대응이론 correspondance theory’이란 이름으로 정립하였다.

 

 

# 근면성실과 교육

 

근면성실이라는 가치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에게도 바람직한 도덕관념이 아닌가 하는 반발이 예상된다. 근면성실 자체가 나쁜 덕목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근면성실이라는 것이 내일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오늘 죽도록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선량한 덕목일 수 없다. 근로대중에게 그러한 삶을 강권하는 기업이 있다면 악덕 자본가이며, 그러한 덕목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올바른 교육이라 할 수 없다. 선량한 교육기관이라면, 학생이 감기몸살로 몸을 못 움직일 형편이라면 학교가 아닌 병원으로 가게 해야 한다. 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자리 잡기 위해선 '개근이라는 개념이 폐기돼야 한다. 출결점검은 오직 학년 진급을 위한 최소 출석일수를 가늠하기 위한 셈법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우리 교사들 가운데 1년 혹은 3년 동안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음을 자랑삼아 떠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훌륭하다 할 것이 아니라 미친 놈 취급 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들에겐 개근을 권장하는가?

어른에게 일터가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오는 곳이 아니듯 학생에게 학교는 매일 오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나아가, 땡땡이를 전혀 칠 줄 모르는 범생이의 자세보다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엔 학교 빼먹고 친구들과 들놀이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뿐더러 바람직하기까지 하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풍성하게 한 사람들은 범생이가 아닌 시인의 감성과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죽은 사회 dead poet society’에서 희망은 없다. 최소한 학교가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된다.

 

2017.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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