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다문화에 대한 기억

리틀윙 2017. 2. 27. 01:49

새 학년도 학급경영을 위한 자료로서 <학생명부>의 비고란에 다문화한부모가정이란 특기사항 기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올렸더니 몇몇 페친께서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의견을 주셨다. 원활한 학생지도를 위해 정보공유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이 글은 이에 대한 재반론 의견이다. 이 분들의 반론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게 되었기에 고마운 마음이다. 모든 대립은 발전을 낳는다.

(미리 말하지만, 나의 문제의식은 학생명부 비고란에 다문화적는 것에 대한 왈가왈부는 아니다. 우리사회와 학교에 만연한 다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말하고자 한다.)

 

내 논리 전개를 위해 교육과정이라는 개념을 끌어올 필요를 느낀다.

교육과정하면 흔히 교과서를 생각하는데,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다르다. 이를테면 학교 교육일상 가운데 아침조회운동회는 교과서에 없지만 중요한 교육과정(학교교육과정)이다. 교육과정이라 함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학교(교사들)가 의도하든 안 하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습해 가는 모든 것이 곧 교육과정인 것이다.

 

이 중,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의도한 교육과정을 표면적 교육과정(manifest curriculum)이라 하고, 학교의 의도와 무관하게 학생들이 학습해가는 것을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라 한다. 이를테면 애국조회(아침조회)’라는 교육과정이 표면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학생들의 올바른 정서함양 따위겠지만, 이와 무관하게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아침조회는 괴로운 것”,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게 최선”,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은 잔소리등일 뿐이다.

 

표면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 가운데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 첫째, 학교가 무엇을 의도(input)하든, 교육의 결과(output)는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나타나고, 둘째, 성격상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강력하게 학생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덕 시간에 교과서를 통해서는 민주주의를 배우지만, 교실 일상 속에서 학생들은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으로부터 독재를 배우기가 훨씬 쉽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샴의 법칙을 원용하면, “잠재적 교육과정이 표면적 교육과정을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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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라는 개념으로부터 학생들은 무엇을 학습할까?

이와 관련하여 몇 년 전에 겪은 뼈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4학년 교과서에 소수자라는 키워드가 나오는데 교과서가 의도하는 것은 차이에 대한 존중이다. 사회적 소수자의 외연으로 북한이탈주민에 이어 다문화가 나오는데, 이 개념 설명을 한창 하고 있는 중 불쑥 한 아이가 우리 반에도 있어요!”라고 한다. 그 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한 아이를 향하고 그 아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린다. 그 아이는 말하자면 현실 속의 다문화로서 추상적인 교과서 공부내용을 실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자료였던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 아이의 사례를 다문화라는 개념의 폭력성을 방증하는 실물적인 근거로 제안하고자 한다.

말이 다문화지 아이의 경우는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그러했다. 베트남에서 온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니 사실상 이 아이의 가족구조는 다문화도 아니다. 한창 엄마를 찾을 나이에 엄마 잃은 것도 서러운데 아이는 학교에서 다문화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아빠와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 말이 어눌하다거나 하는 불편도 없다. 아이가 겪는 유일한 불편은 다문화라는 사회적 라벨링이다.

 

Imagine there’s no country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존 레넌의 말대로, 만약 국경선이라는 게 없다면 민족이니 종교니 하는 이름의 대량살상이나 증오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룰 것이다.

 

다문화에 대해 내가 품는 문제의식도 이런 것이다.

현실 속에 다문화는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한 사회적 배려와 다른 학생들에게 차이의 존중따위를 가르쳐야 되지 않느냐라 할 것이다.

물론이다. 배려해야 하고 다문화 아닌 학생들에게 차이의 존중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런 순수한 의도와 무관하게 현실 속에서 얼마나 불순한 결과가 빚어지는가를 보자는 것이다.

 

이 모든 엇박자가 빚어지는 근본 이유는 다문화라는 호명(naming) 때문이다.

하나의 낱말은 인간의식의 소우주다(비고츠키). “차이의 존중과 사회적 배려라는 표면적 의도와 무관하게 다문화라는 호명은 잠재적으로 차이의 강화와 사회적 폭력을 학습시킨다.

 

우리는 노란 색 옷 입은 사람을 노란 옷 입은 사람이라 일컫지 않는다. 노란 색이든 파란 색이든 빨간 색이든, 이런저런 색의 옷을 입은......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다문화라는 이름을 짓는 순간부터, 한국인은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다문화인 사람과 다문화 아닌 사람. 그리고 전자에 대해선 소수자, 후자에 대해선 정상인이라는 인간의식의 소우주가 형성된다. 존 레넌의 맥락으로, 일종의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다.

다문화라는 이름이 없으면 국경선도 사라질 것이다.

 

2017.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