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인간 의식의 성장

리틀윙 2015. 11. 30. 11:23

A) 사진에서 뭐가 보이는가?

B) 사과!

A) 나는 사진에서 사과가 보이는 게 아니라 애플이 보인다. APPLE

B) 애플이나 사과나 같은 게 아닌가???

 

 

 

  교육이라는 것은 교사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에 해당하는 하나의 적확한 낱말로 나는 의미를 생각한다. , 교육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의미(significance)는 말을 매개로 전달되는데 말의 본질은 기호(sign)이다. 그런데, 소쉬르가 밝혔듯이, 기호를 구성하는 두 축인 기표(시니피앙 signific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d) 사이에 필연성은 없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까닭에 다양한 방식의 결합이 가능하다.

(페친 @Seok Woo Stewart Hong 의 타임라인에서 빌려온) 사진 속의 물체에 대한 기호인 사과라는 기표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기의)를 부여할(signify) 수 있다. 시골 할머니의 눈엔 그저 누군가가 먹다 남은 사과로 보이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눈에는 애플 로고로 보일 것이다. 또한 디즈니 만화를 본 어린 아이는 백설공주의 사과를 떠올릴 것이며, 문화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성인은 윌리엄 텔이나 비틀즈의 사과를 떠올릴 것이다.

 

하나의 낱말은 인간 의식의 소우주다(비고츠키). 그런데 하나의 낱말에 대해 개인이 품고 있는 의미의 외연에 따라 의식의 지평이 달라지는 것이다. 유능한 교사는 폭넓은 의식의 지평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다. ‘사과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의식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학생들에게 풍부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

 

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은 잡다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교사의 의식은 삶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독서를 통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치열한 성찰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식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이 지적 각성이 치열한 것일수록 교사의 교육실천은 학생들에게 울림으로 다가간다.

 

다시,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돌아가자.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라는 말은 조작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흔히 이데올로기라 일컫는 것이다.

교육은 대중을 상대로 상징 조작을 펼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세뇌교육이라 일컫는데, 사실 모든 교육은 세뇌교육인 지도 모른다.

 

콜럼버스라는 기표를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품고 있는 기의는 모험심 혹은 도전정신의 화신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서(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보라)를 읽으면 이 자가 인류역사상 최악의 살인마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의미체계라는 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오직 하나의 통일된 관점을 강요하는 교과서의 국정화는 아니 될 일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자신의 관점을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는 자신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나 기존의 지배적이고 일방적인 관점과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교육은 가치가 있다.

 

학생이 혼란을 겪으면 어떡하냐고?

 

그게 참된 교육자의 마땅한 의무가 아닐까? 소크라테스가 말한 등에로서 말이다.

 

인간의 의식이 성장하는 것은 나침반과도 같다.

나침반은 언제나 좌우로 흔들리다가 마침내 정북을 가리킨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 난 나침반일 뿐이다.

 

학생들은 이런저런 교사로부터 얻은 다양한 관점을 자양분 삼아 건강한 공민으로 성장해 간다.

교육의 효과는 교사의 삶을 넘을 수 없다. 치열한 성찰과 실천이 결합된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사의 가르침만이 학생을 바람직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

 

가르치는 일이란 자기몰입적 경험이지,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에 끝나는 기계적인 직무는 아니다.

 

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