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유대인과 자본주의, 그 기묘한 공동의 운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리틀윙 2017. 2. 27. 02:10

은행을 뜻하는 영단어 bank의 유래가 흥미롭다.

bank는 라틴어 banco에서 유래한다. 방코는 탁자(책상)’란 뜻이다(bench와 어원이 같다). 이탈리아 베니스에는 ‘Banco Rosso Tours’라는 여행상품이 있는 모양이다. Banco Rosso붉은 책상이란 뜻인데, 그림에서 유대인 복장을 한 남자가 붉은 책상에 앉아 있다(관광객들에게 전시할 목적으로 만든 밀납인형일 것 같다). 그렇다. 이 낱말은 유대인과 관계있다.

 

 

 

 

 

해상교통이 발달한 베니스(베네치아)는 중세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다. 바빌론 유수(幽囚) 이후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유럽 각지로 퍼졌는데(이를 분산이라는 뜻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 일컫는다), 그리스와 로마 지역에 많이 살았다. 알다시피 유럽사회에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팔아넘긴 민족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베니스의 유대인들은 '게토 ghetto'라는 특별구역에서만 살아야 했다(미국에서 흑인빈민가를 뜻하는 게토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해가 지면 경비병들은 출입문을 차단하여 유대인들이 바깥세상으로 못 나오도록 차단하기까지 했다. 이런 혹독한 삶의 조건 탓에 유대인들은 경제활동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우 제한적인 직업밖에 못 가졌는데 그림에서 보는 직업이 그 하나다.

 

바로 대부업 즉, 돈이 필요한 사람으로부터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일로서 자본주의 경제의 기반이라 할 금융산업의 맹아가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당시 유럽사회에선, 유대인 하면 곧 수전노 혹은 고리대금업자를 연상하리만큼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유대인의 자질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존재조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땅을 사서 농사를 짓거나 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황에 따라 언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에 장사를 하더라도 갑작스런 이동에 따른 손실이 적은 상품으로 이를테면 식료품 장사 같은 것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피땀 흘려 모은 자산을 보존하기 수단으로 금은화폐의 축적에 관심이 많았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같은 유대인이 없진 않았겠지만 유대인을 사악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백인 중심 기독교사회의 편견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사악한 쪽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사회에 혼란이 발생할 때 지배계급은 희생양을 만들어 위기를 모면해 간다. 관동대지진 때 일제가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면서 민심을 수습했듯이 유럽의 지배계급은 사회적 불만이 쌓이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유대인들을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는가 하면 채무증서를 불태움으로써 대중의 사회적 불만을 잠재웠다.

 

이렇게 멸시와 박해를 받던 유대인의 암울한 운명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유럽 역사에 중대한 세 가지 차원의 변화가 천하디 천한 유대인을 역사의 주인공 반열에 올려놓았다.

 

1. 종교개혁

사실, 신앙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돈놀이로 돈을 버는 것은 중대한 모순이었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돈으로 돈 버는 대부업 자체를 금기하는 구절이 나오기도 한다(신명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교도에게는 괜찮다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유대인들은 백인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돈 장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에게 형제가 겉옷을 벗어 달라 하면 속옷까지 벗어 주라거나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나 교회 중심의 공동체적 삶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중세 유럽의 전반적인 정서에 입각할 때, “돈 밖에 모르는유대인들은 사악한 영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존 로마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기독교의 혁신을 주장하는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특히, 근면검소를 통한 부의 축적을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한 칼뱅의 예정설(Predestination)은 유대인들을 재물욕의 화신에서 새 시대의 이상적인 시민의 모범으로 바꿔 놓았다. 구교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백인들의 입장에선 세상말세였지만, 종교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유대인들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은 구교(가톨릭)’가 공동의 적인 점에서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했지만,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 신교의 혁신적 입장(이에 관해서는 후술함)이 유대인들의 존재양식과 조화를 이루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둘은 찰떡궁합이었다.

 

2. 지리상의 발견

15세기말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을 시작으로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 대륙 저 대륙을 넘나들면서 무역이 활발히 벌어지기 시작했고 더불어 상공업도 엄청 발전해 갔다. 경제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자본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유럽의 돈줄은 대부분 유대인이 쥐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다.

 

3. 시민혁명

새로운 시대의 탄생은 낡은 체제(앙상 레짐)의 해체를 요구했다.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이어 영국에서도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치체제의 패러다임 교체를 주도한 신흥세력들(부르주아)이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줄을 댔던 것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혁명의 자금을 제공하고 혁명세력은 유대인에게 밝은 미래를 보증해 주었다. 시민혁명이 성공한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영국 파운드화 화폐발행권을 갖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게토에 갇혀 거주이전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예처럼 살다가 드디어 새로운 유럽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

 

여기까지는 교과서나 웬만한 교양서적에 다 나오는 내용들이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하는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마르크스주의라는 정신 도구(psychological tool)로 들여다보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중세봉건사회에서 근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유럽역사의 역동적 측면에 대해서도 흥미 있게 음미할 수 있다.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의 소수자에서 역사발전의 주인공이 되게 한 대반전의 드라마를 가능케 한 세 가지 변화는 사회구성체는 그 물질적 기초를 이루는 생산관계, 즉 토대 위에서 형성된 상부구조(종교, 정치제도, 사회 문화, 사회 의식)로 이루어지는데, 상부구조의 변화 발전은 그 물질적 토대의 근간인 생산관계의 변화에 말미암는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식(=정신 도구)으로 명쾌히 설명된다.

 

2017.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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