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진보철학의 현실태

리틀윙 2017. 2. 27. 00:28

 

변증법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작하여 루카치와 싸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이론적 변종을 거듭해왔다.

임승수의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은 형이상학과 대조를 보인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는데 저자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형이상학과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형이상학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변증법은 연관의 맥락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사물의 근본 속성이 변화와 운동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면, 형이상학적 관점은 사물에 내재된 대립적 측면을 상호 연관의 맥락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변화와 운동의 측면도 무시한다.

 

 

 

 

저자는 이 논리를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 체계에 적용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는 절대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는 절대악으로 규정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편 가르기야말로 형이상학적 오류의 전형이다. (진보, 보수), (이론, 실천), (정신, 물질) 등의 범주쌍의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변증법의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은 다만 선차성의 문제로서 둘 가운데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과 대상에 따라 탄력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 선차성의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이 진보와 보수이다. 풍랑이 휘몰아치는데도 배를 띄워야 하나? 바다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보수적 관점은 나쁜 것인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임승수의 원숭이 시리즈에 늘 유감을 품는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원숭이도 이해할 수 있는 사상체계가 아니다. 어려운 학문에 주눅 들지 말고 과감히 도전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이 정교하고 심오한 사상을 이것은 맞거나 옳고 저것은 틀리거나 나쁘다는 식의 양자택일을 권장하는 것은 반변증법적이다.

 

이것은 고대 마니교 사상 따위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선악이분법이다.

원숭이와 인간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설명체계는 종교계의 교리문답을 연상케 한다. 교리문답은 언제나 반지성적인 선악이분법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웃기는 것은...

저자가 그렇게 떠들어 대는 진보의 현실태를 보면 변증법보다는 형이상학에 가까운 점이다.

관념 속의 진보가 아닌 현실 속의 진보의 실태를 보라.

진보 진영의 사람들보다 더 변화를 싫어하고 구태에 안주하려는퇴행적인 집단도 없지 않은가?

형이상학을 논하기 전에 이율배반을 먼저 짚을 일이다. 기존 사회질서를 때려 부시는 것에만 관심 있고 자기 혁신은 안중에도 없는 입장이 과연 진보적이고 변증법에 가까운가?

 

마르크스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런 책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조잡한 교리문답서가 진보운동가들의 교양 강좌 텍스트로 유통되는 현실이 이 나라 진보의 현주소를 대변해 준다.

그나마 이런 책조차 펼쳐 드는 사람조차 아주 드물 것이며 더구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 더욱 서글픈 현실이니, 오호통재라!

 

2016. 1.15.

'이론과 실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와 외연: 예를 들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같다  (1) 2017.02.27
페다고지  (0) 2017.02.27
이론과 실천  (0) 2017.02.26
부정 (5/5) – 미학적 삶  (0) 2017.02.26
부정 4 – Comfortably Numb  (0) 2017.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