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리 자작은 건강한 정신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멋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또한 인자하고 상냥한 성품에 매혹적이고도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귀부인이었다. 그들의 무남독녀 비올랑트는 두 사람의 장점만을 물려받아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했다. 스티리 자작 부부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에 염증을 느껴 스티리 가문 영지의 외딴 시골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사냥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비올랑트를 고아로 남겨 두고 떠났다. 어린 비올랑트는 충직한 집사인 오귀스탱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외딴 시골에서 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비올랑트에겐 대자연이 친구였고 몽상이 교육이었다. 몽상에 의해 길러지고 몽상을 통해 깨우쳐 갔다. 비올랑트의 삶은 늘 기쁨과 환희로 가득차 있었고 간혹 슬픔이 닥쳐와도 이내 그것을 기쁨으로 전화시켜가는 지혜를 그녀는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 왔다. 그럭저럭 그녀는 그를 뿌리치지만, 이성과 바깥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뿌리치진 못했다. 비올랑트는 사교계에 살짝 발을 들였다가 시골뜨기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했다. 그녀는 자기보다 못난 여인들에게 조롱 받은 것에 분개하여 정식으로 사교계에 뛰어 들어 그 세계를 평정하리라 마음먹었다. 오귀스탱 노인에겐 그 목적을 달성하고 곧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다.
볼품없는 사교계의 속물들 속에서 그녀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자신의 바램대로 사교계를 평정했다. 지위와 권력을 지닌 귀족들은 물론 독신을 고집하는 잘난 예술가들도 그녀 앞에선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뭇 남성들의 접근을 뿌리치던 그녀가 놀랍게도 가진 거라곤 돈 밖에 없는 어느 공작과 결혼을 하였다. 그가 지닌 막대한 재산은 그녀 같은 ‘예술품’에 어울리는 틀을 제공해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질적 풍요의 안락 속에서 그녀는 점점 예술품에서 사치품으로 전락해갔다.
이를 지켜보던 오귀스탱이 그녀를 질타했다. “어째서 마님께선 옛날의 비올랑트가 그렇게 경멸하던 것들을 즐기고 계십니까?” 오귀스탱은 그녀가 권태를 느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귀스탱의 바람대로 공작부인은 권태를 느껴갔다. 그녀의 얼굴에선 더 이상 쾌활함의 기미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남편에게 시골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티리로 향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져 갔다. 그녀는 이미 변해 있었다. 자연 속에서 고독을 즐기며 몽상과 사색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물질적 풍요가 주는 쾌감을 밀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오귀스탱은 그녀가 더 나이가 들면 혐오를 느낄 것이라 계산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힘을 계산하지 못했다. 허영이라는 이름으로 길러진 그 힘이 혐오와 권태마저 무찔러 버린 것이었는데.....
그 힘은 다름 아닌 “습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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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흥미있게 읽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단편을 책꽂이에서 꺼내와 그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은...... 요즘 내 일상에 닥친 모종의 변해가는 삶에 불편을 느껴서이다. 솔직히, 나도 그 변화가 싫진 않다. 정녕 그것은 달달한 유혹으로 내게 다가온다.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애써 경계심의 끈을 동여매려는 것이다.
작년에 책을 내고 나서 강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왜 나를 안 불러주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요즘은 나를 부르는 것이 부담스럽다. 내 시간 뺏기는 것이 불편하고, 유명세를 타는 것도 싫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돈’과 관련한 것이다. 연수원 같은 곳에서 강의 하고 나서 내 계좌로 상당 금액이 입금 되는 것을 확인할 때, 사람이면 누구나 (행동주의심리학의 용어로) 쾌감(pleasure)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거듭되는 ‘정적 강화’를 통해 이 쾌감이 익숙해지면, 내가 나로부터 멀어져갈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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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내 나름으로 간명하게 정의해보라면, “돈이 인간을 조건화(conditioning) 시키는 기제”라 하겠다.
나는 지적 소유권이니 지식노동이니 하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나의 지식은 내가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지적 노력과 치열한 고뇌의 산물로 세상에 나온 수많은 책을 통해 나의 지성이 영글어진 것이다. 즉, 내 지적 역량은 철저히 사회적 소산이다. 따라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 재미로 학문을 하는 것이다. 그 재미란 지적 과시 내지 자랑질일 수도 있고 고상하게는 지성의 집단적 공유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나의 자질은 돈으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년 전 전교조경북지부 교육국장 할 때, 프레이리 강연 요청을 받고 봉화까지 차를 몰고 가서 하루 종일 강의한 적이 있다. 조직 내 일꾼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 출장비 밖에 안 나온다. 내가 받은 돈은 기름값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강의를 요청한 선생님들이 고마웠고 혼신을 힘을 다해 강의했다.
그런데 어제 똑같은 조건으로 어떤 공부 그룹에서 강의를 요청해 오시는데 그 쪽에서 제시한 강의료가 너무 많았다. 돈 많이 주는데 마다 할 이유가 없지만...... 망설임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자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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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빛나는 통찰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듯, 습관(=조건화)은 무서운 것이다.
예전에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조심해야 한다.
그 낯선 무엇이 습관처럼 자리하게 되면, 나를 나답게 한 무엇이 낯설어지는(alien) 역설적 재앙이 초래된다.
철학자 마르크스가 소외(alienation)라 일컬은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우리는 점점 많이 소유할수록 본래의 자신과 멀어져 간다.
The more we have, the less we are.
물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지불되어야 한다. 오직 강의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지식노동자라면 강의료는 듬뿍 챙겨야 한다. 하지만, 교사인 내게 강의는 수입의 원천이 아니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 내가 더 가져야 할 무엇이 있다면...... 사람 밖에 없다.
2016.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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