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부정 -2

리틀윙 2017. 2. 26. 10:32

지난 글에서 나는 부정이란 낱말보다 더 아름다운 개념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고, 즉 철학적 사유는 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사유란 본질적으로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부정이다.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지점이 사유에 있다고 할 때, 사유의 출발은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현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그것을 부정하며 현상 이면에 있는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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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부정의 반대는 뭘까? ,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고 1차원적 삶을 살게 하는 나쁜 속성은 뭘까?

 

부정의 반대로 긍정을 생각할 수 있다. 맞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철학의 본질이 부정의 변증법에 있다면, 그 대립지점에 있는 긍정의 철학사유하는 삶의 적이라 하겠는데, 철학사에서 이러한 사조가 바로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는 영어로 ‘Positivism’인데, 형용사 positive는 알다시피 긍정적인이란 뜻이다. , 실증주의적 사고는 눈앞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며.... 나아가 그것(=현상적 팩트)만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실증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은 실증적으로 다룰 수 없기때문이다. 실증주의는 오늘날 분석철학으로 계승되는데, 분석철학은 팩트와 가치를 분리하고서 오직 팩트만을 다룬다.”

 

팩트와 가치를 분리하면,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하루에 40명이 자살을 하는 팩트에만 관심을 갖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지?”, “나머지 산 사람들은 이러한 팩트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그게 철학인가? 그게 철학적 자세일 수 있는가? 그게 인간다운 사유양식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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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진리를 쫓는 사유체계이다.

이 명제에서 철학이란 말 대신에 공부라는 말을 넣어도 성립한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에서 진리는 선 또는 미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메르체데스 벤츠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명품 차를 만든데 투여된 노동자의 땀과 한숨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으며, 절대다수의 흙수저들에게 그 차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야 한다. 선의 본질은 공동선이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좋아야(선해야) 선한 것이지, 소수의 금수저들에게만 좋은 것은 선이 아니다.

사유가 여기까지 미치면.... 필연적으로 분노라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유(=이성)는 감성과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에서 이성과 감성, 이론과 실천, 그리고...... 팩트와 가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간다. 변증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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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진실 = 팩트)가 가치문제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당파적이다.

당파적이라 함은, 그것이 흙수저와 금수저 가운데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철학의 본질이 현상에 대한 부정이어야 하는 까닭은...... 현실세계의 모순이 은폐하고 있는 본질을 들춰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부정적 사유는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고 치유하는 순기능을 갖는데 그 순기능은 절대다수에 해당하는 흙수저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 “부정적 사유는 당파적으로 그늘진 곳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다.

 

반대로, 현실세계의 모순을 부정하지 않고, 사회현상에서 가치적 측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채 오직 팩트만을 학문적 대상으로 다루는 긍정의 철학(=positivism)은 현재의 상황(현상 status quo)의 유지를 위해 복무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실증주의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복무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 , “나는 오직 팩트만을 다룰 뿐, 누구 편에 서는 것이 아니야라 하는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학문은 있을 수 없다. 순수문학, 순수예술 어쩌구 하는 것들보다 더 불순한것도 없다.

 

팩트와 가치를 분리시킨 채, 오직 팩트의 문제만을 집착하게 되면, 종국적으로는 팩트 자체도 거짓되게 하는 모순을 범하게 되는데, 통계학이라는 학문이 현실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은폐하기 위해 얼마나 사실을 왜곡시켜 오고 있는지에 관해.... 내가 번역한 [교실을 위한 프레이리]12장에 멋지게 묘사되고 있다. 이 책 혼자 읽기에 조금 어렵지만, 12장 한 파트만 제대로 읽어도 본전은 뽑는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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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부정과 긍정의 문제를

최근 교육계의 핫이슈인 성과급 문제와 연결지어 보자.

 

성과급과 관련하여 우리 교사들이 품는 문제인식이 과연 팩트의 문제가 전부인가? , “누가 S등급을 받고 또 누구는 B등급을 받았다거나 “S등급이 몇 퍼센트이고 B등급은 몇 퍼센트, 두 등급의 금액 차이가 얼마”... 하는 실증주의의 문제가 우리 관심사의 전부인가?

 

말도 아니라 할 것이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일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성과급 문제를 주제로 부정이란 화두의 글 작업을 계속 펼쳐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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