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부정 - 1

리틀윙 2017. 2. 26. 10:28

Rather than love, than money, than fame, give me truth.

사랑보다, 재물보다, 명성보다, 나에게 진리를 달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멋진 삶만큼이나 그가 남긴 멋진 한 문장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의 한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 진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진리는 맥도널드 매장의 치킨버그처럼, 준비된 상태로 주어지진 않는다. 그것은 ready-made가 아닌, becoming(생성)의 형식으로 발견되고 재발견될 뿐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끊임없이 부정되어야 할 운명이다. 부정이 없이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소리가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듯이, 진리는 부정이라는 매개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진리가 부단한 부정의 부정 negation of negation’의 과정을 통해 획득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진리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우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유아의 사고력과 어른의 사고력은 같지 않다. 우리의 인식 역량은 끊임없이 성장해 간다. 피아제의 논리를 빌려 설명하면, 유기체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끊임없는 동화와 조절의 연속으로 지식을 획득해 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아이는 알파벳 ‘c’‘k’발음이 나는 것을 알고서 ++=이 되는 한글발음원리의 기존 인지체계(=스키마)를 이용하여 cat이라는 단어를 으로 읽어낸다(=동화 assimilation). 그러나 이러한 스키마는 곧 chair라는 단어 앞에서 무기력을 드러내고 만다. 이젠 ‘ch’라는 자극에 대한 별도의 적응이 필요하니 이것이 조절 accommodation’이다. 계속해서 ‘school’이나 ‘machine’이란 단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조절이 이루어질 것이다.

 

영어낱말에 대한 인식은 진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사춘기와 청년기 그리고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끊임없이 부정의 부정을 거치며 변해간다.

 

 

둘째, 인식의 주체가 변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대상인 객관세계(=객체)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기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수정(=부정)이 불가피하다.

 

1) 아기 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성장해서는 부모의 속을 썩이는 것처럼, 연애 할 때의 남자가 결혼한 뒤에 변하는 것처럼 우리와 마주하는 대상(객체)은 늘 변한다.

 

2) 대학 이전에 알았던 북한사회와 사회과학 책을 읽은 뒤의 북한사회는 달랐다. 그리고 김일성 사후 3대세습을 거치면서 또 달라지고 있다. 북한사회라는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사고는 변할 수밖에 없다.

 

3) 심지어 천년만년 변함없으리라 생각하기 쉬운 자연세계 또한 변한다. 지구 표면의 대륙이 이 순간에도 조금씩 이동하고 있고,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듯이 지구도 언젠가는 사멸한다. 또한,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태양계의 행성 가운데 명왕성은 최근에 퇴출되었다.

 

  

진리가 부정을 통해 발견될 수밖에 없는 세 번째의 이유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과 관계있다.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무엇을 철학 용어로 현상(appearance)’ 이라하고 그 이면에 있는 진리를 본질(essence)’이라 한다.

 

마르크스는 현상과 본질이 일치한다면 어떠한 과학도 필요치 않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 진리는 언제나 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들여다보는 사유능력이 요구된다. 이를테면, 원시인들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과의 자유낙하운동이라는 현상 속에 중력이라는 본질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이 중력을 발견해낸 것은 특별한 사유역량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사유 역량을 키워야만 하는데, 이는 무엇보다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부정적 사고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은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겼다.

 

 사유란 본질적으로 우리 눈앞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부정이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지적인 사고는 부정적인 사유양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한 차례의 부정으로 진리가 획득되진 않는다. 끊임없는 부정의 부정을 거치면서 변증법적으로 진리에 도달해야 하니... 지적인 사유는 본질적으로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s)”인 것이다.

  

부정(negation)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를 알지 못한다. 

이는 결코 사춘기적인 치기의 발동이 아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 용기를 지닌 이라면, ‘부정이라는 낱말에 애정을 갖는 것은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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