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교사들이여, 과격해 지자(1)

리틀윙 2017. 2. 26. 09:31

어제 이어서 오늘도 무익한 안전교육연수가 계속된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부터 짼다.

15시간 1학점짜리 연수이기에 2일간 배치된 연수지만, 원래 나는 오늘 개인 일정이 있어서 처음부터 토요일 연수는 안 가려 했다. 그럼 왜 신청했냐고? 아무도 희망 안 해서 내가 신청한 거다. 교무란 그런 자리이고 교육운동 하는 사람 입장에서 남들이 다 싫어하는 걸 떠안는 건 기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청 연수의 명분이 없는 거다. , 이 연수에 참여하는 사람 가운데 자발적으로 원해서 온 사람은 거의 없다. 교육의 성패에서 학습자의 학습의지와 흥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기에 이 연수는 원천적으로 실효성이 없는 거다. 어제 글에서 말했듯이, 이건 교육청 실적 올리기 위해 교사를 쥐어짜는전형적인 폭압적 관료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래도 이젠 나이도 먹고 했으니 조용히 시간 때우려 했다. 책 보거나 글 작업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제 2시간 마치고 실습을 위해 책상 뒤로 물리라는 주문이 떨어지는 걸 보고 바로 가방 싸서 나와 버렸다. 어디 갔냐고? 학교로 갔다.

 

연수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학교에 오니까 교감 샘이 놀란다. 그런데 교사인 사람이 학교로 향하는 게 어디 놀랄 일인가? 교무실 책상에 앉아 학기말 업무처리에 몰입했다.

연수장에선 책상 물리고서 뭘 하냐 하면, 고무 인형 눕혀 놓고 심폐소생술 훈련하는 거였다. 근데 세월호 이후 이 짓 지겹도록 하지 않았나? 며칠 전에도 3년마다 한 번씩 의무적으로 연수받아야 한다고 해서 심폐소생술 훈련 받았다.

도대체 이 바쁜 학기말 시즌에 선생들 모아 놓고 뭐 하는 짓거리인가?

하여튼 대한민국 교육이 흥하려면 교육청을 폭파시켜야 한다.

 

내가 이 무익한 연수를 제낌으로 인해 누구에게 약간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일까? 없다. 오히려 그 시간에 고무인형 가슴 누르는 짓거리(이 더운 여름에) 하는 것보다 교무실 책상에 앉아 학교 업무 보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는가?

 

, 딱 한 분에게 미안하긴 하다. 장학사님이 눈에 밟힌다.

그러나, 거꾸로 장학사님은 우리 교사들에게 미안한 점이 없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란다.

 

장학사님도 교사시절 보내고 그 자리에 계실 터, 이 바쁜 시국에 교육청에서 선생 불러 조지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안 느낀다면, 당신은 작금에 온 국민을 멘붕에 빠뜨리고 있는 개돼지론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군대가 아닌 학교다. 우리는 군바리가 아니라 존귀한 스승이고 전문직 종사자이다.

 

까라면 깔 것이지 뭔 말이 많냐고?

 

우리가 개돼지냐? 까라면 까게?

당신들 눈엔 우리가 선생으로 안 보이는가?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개돼지라 불러라. 당신들과 막장 정책관의 차이는 속으로 선생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겉으로도 개돼지라 일컫고 안 일컫고의 차이 밖에 없다.

 

...............

 

교직은 전문직이다. 전문직의 정수는 고도의 자율성에 있다. 그러기에 교사인 사람은 칸트가 말하듯이,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자기입법의 주인이 돼야 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지나면서 학교가 과거 파쇼 암흑기로 회귀해가고 있다. 우리 교사들을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개돼지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 초임 시절 군사정권기의 학교가 그랬다. 그 암울한 시절 내가 존귀한 스승으로서 품위를 지켜내기 위해 자기입법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 있으니, ‘선한 깡패론이다.

 

선생을 개돼지 취급하는 언어도단의 현실 속에서 내가 품위 있는 교직삶을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강단(깡다구)’이 전부였다. 논리나 개인역량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시절 장학사들이나 교장/교감이라는 사람들은 무식해서 대화가 안 통했다. 이를테면 이 문맥에서 내가 칸트의 도덕률을 근거로 이 연수의 부당함을 이야기 한들 그 사람들이 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개돼지론이 횡행하는 막장 교육관료계에선 오직 승진점수밖에 모르는 단순무식한 인간들이 그 자리에 서는 거였다. 따라서 이런 자들과 벌이는 싸움의 관건은 오직 힘 대 힘의 방정식이 전부이다. 진부한 말로, 이런 한심한 관료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모를 보이는 바, 세게 나가는 교사는 백전백승이다.

 

, 여기서 선한 깡패론에서 수식어에 해당하는 선량함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강단만 있고 선량함은 없으면 그건 그냥 양아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전교조 활동가 가운데 이런 분들 적지 않고 이런 분들 땜에 전교조가 욕을 먹는다.

선한 깡패가 되기 위해 우리는

 

첫째, 강단의 발동을 나 자신이 아닌 대승적 차원의 교사 해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둘째, 교육적 진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평소 학교 일상에서 근면성실과 헌신으로 교사대중의 존경과 인정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선한 깡패의 삶은 무난한 방관자의 삶보다 100배 더 어렵다.

 

선한 깡패란 수사는 따뜻한 얼음이란 말처럼 형용모순이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갖 모순으로 얽혀 있는 복잡한 인간사를 그런 단순한 형식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미분화된 사고일 뿐이다. 겉으로는 교사가 존경받는 교단 어쩌구 하면서(=형식), 실제로는 까라면 까라는 식의 식민지의 백성 취급하는 교직사회에서(=내용), 형식과 내용의 모순에 따른 전략/전술의 모순은 불가피하다. 쉽게 말해 나의 선한 깡패론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롭기를 골자로 하는 예수님의 지침을 투박하게 표현한 것뿐이다.

 

선한 깡패의 행보는 그리 쉽지 않다. 강단과 진정성 그리고 헌신 외에 역량이 뒷받침 돼야 한다. 불선한 관리자에게 타격을 가하는 한편, 나의 개인 역량이 학교의 발전에 일익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승진파 교사들은 개인 입신을 위해 역량을 기르지만, 선한 깡패는 교육운동을 위해 역량을 기른다.

 

20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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