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1992~1993년 한국교원대대학원에 석사과정을 다녔다. ‘특별전형’이라 일컫는 이 과정은 현장교사가 학교를 떠나 교원대대학원에 파견 가서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실로 엄청난 특혜를 누렸던 것이다. 이 시기는 내가 지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나의 학문적 성장이 그 대학의 내 전공교수들로 말미암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교수들이 대학원생들을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대학원생들이 교수의 성장을 도왔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우리 과에 전공교수가 2명 있었다. 한 사람은 서울대를 나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출신인데, 이 화려한 스펙에 대한 자부심이 도가 넘칠 정도로 강해서 서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곤 하는 지적 우월감이 거의 병적 수준이었다. 편의상 이 교수를 ‘갑’이라 칭하자. 그런데 갑의 이 정신병적 폭력의 주된 타겟은 ‘을’이라 칭할 다른 한 교수다.
을은 박정희시대에 서독에 광부로 가서 거기서 디플로마를 받고서 어찌어찌해서 교원대 교수가 된 인물이다. ‘diploma’는 ‘학위(degree)’와 다르다. 디플로마는 ‘수료증 certificate’과 비슷하게 취급된다. 학벌이라곤 호남의 어느 시골에서 농고를 졸업한 것이 전부인 이 분이 광부에서 출발하여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인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문제는 이 분의 지적 능력이 아주 한심한 수준이라는 점. 한 학기 강의를 접는 어느 시점에서 가졌던 종강파티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은 난센스 퀴즈를 냈다. “골프장에서 캐디가 하는 일을 여섯 글자로 줄여 말하면?” 답은 “공수래공수거”였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였기에 우리 일행이 모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이 교수라는 사람이 “공수래공수거? 그게 뭔 말이여?”라며 평소 잘 안 쓰던 전라도 액센트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정상적인 지력을 가진 성인이라면 필요치 않을 부연설명을 우리 학생들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교수라는 분이 말이다. 아마 그 자리에 갑이 있었으면 이 분은 이런 황당한 무지를 노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표정관리와 함께 지력관리(?)도 했을 것이다.
이 한심한 을이라는 분이 롤 모델로 삼는 교수가 교육철학과의 손**라는 분이다. 우리 과 두 분의 인간성도 걸레 수준이지만 이 자의 악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명색이 교육철학 교수라는 자가, 학부모 초청 강연회 자리에서 “바람직한 자녀 교육” 어쩌구 하면서 늘 똑같은 강연을 녹음 테입 틀듯이 해대고 다니는 양반이 내가 그 대학원 다니던 그 해에 자기 자식 대학부정입학사건에 연루되어 그 위대한 이름 석자가 신문을 도배하면서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가 대학원생들에게 얼마나 심한 악행을 일삼았냐 하면, 교원대 대학원생들 대부분 현장에서 파견 나온 교사들인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수시로 “꿇어 앉혀 놓고” 강의를 하는 것이다.(대학원에서 전공수업은 간혹 교수연구실에서 한다) 상상이 되는가? 교육철학계에서 국내 최고의 지성이라는 명망의 소유자가 40대 여교사를 무릎 꿇게 하고선 자기 강의를 듣게 하는 장면이?
그런데 이 자가 잘 쓰던 말이 지금 교육부장관 후보(김명수) - 바로 이 대학 교육학과 교수 출신 - 가 제자 대학원생의 양심선언에 해명하기 위해 쓴 말...... 그 놈의 ‘도제’라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그 깡패같은 패악질을 저질러 놓고선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둘러대는 핑계가 이 ‘도제’라는 개념인데, “대학원 공부는 엄격한 스승 밑에서 빡세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도제’의 사전적 정의는 “어려서부터 스승에게서 직업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을 배우는 직공”으로서 ‘도제식’이란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방법이나 방식”으로 풀이되어 있다. 고려청자 만드는 비법을 배우는 사제관계라면 몰라도 학문의 장에서 이 ‘도제식’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여지가 있을까? 교수 말을 법으로 믿고 여타한 반론은 제기조차 못하는 그런 지적 풍토에서 무슨 학문적 발전이 있을까.....? 아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으로 학생을 제압하는 것도 좋다. 고려청자 만드는 비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교원대 교수라는 작자들이 학생들에게 어떤 ‘은혜입음’을 선사하였을까? 아무 것도 없다. 이 손** 교수는 그 당시 자기 이름의 저서를 103권이나 낸 사람이다. 문제는 그 책들의 내용이 전부 비슷비슷하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자기 손으로 그 책을 작업하지 않는 점이다. 그 놈의 도제관계에 있는 문하생이라 할 대학원생들이 작업해 준 것이다. 말이 도제지 이건 ‘주인과 노예’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 한국사회의 대학원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이 반인륜적인 관계를 최대한 고상하게 일컫는 어법이 김명수 후보자가 말하는 ‘도제관계’인 것이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을’ 교수가 이 악랄한 손**교수를 롤모델로 삼아 배운 것이 “대학원생 시켜 자기 저서 만들기”였는데, 이 꼴통같은 인간이 우리 앞에서 대놓고 “자기 꿈은 손**처럼 평생 100권 이상의 책을 내는 것”이라 노래 부른다. 속으로 우리는 “아이구 죽었다” 복창하곤 했다. 생각해보라. 공수래공수거의 낱말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뭘 배우겠는가? 이 자의 강의시간에 우리가 한 일이라곤 책 만들어 준 것 밖에 없다. 이 자의 전공분야가 ‘○○문제’였는데 이 주제 자체가 별다른 학문적 소양이 없어도 말만 번드러하게 잘 하면 전문가 소리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자 또한 자기 저서들의 속을 펼쳐보면 70퍼센트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 놈의 도제관계에서 그 쓰레기 같은 책들을 만들어 내는 일은 언제나 대학원생들의 몫이라는 것. 강의시간에 자기가 쓴 원고를 들고 와서 학생들에게 뿌려주면 우리는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문장들을 성인수준으로 격상시켜 주는 그 짓을 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 김명수 후보가 말하는 도제관계에선 그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인간이 얼마나 쓰레기인가 하면, 한 번은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자가(이 말은 ‘갑’이 늘 ‘을’을 씹을 때 구사했던 말) 이번에는 번역서를 하나 낸다고 우리 앞에 공표를 하는 것. 그래서 중등영어교사 출신의 선배가 팀장이 되고 우리는 또 번역 작업에 매진 또 매진! 그런데 탈고할 무렵에 출판사에서 교정용으로 제본 떠온 몇 권의 책자를 우리에게 넘긴다. 출판사에 최종적으로 넘기기 전에 좀 더 면밀히 검토하라는 것. 그런데 이 파렴치한 인간이 그 책(책이 아니라 원고를 제본한 것, 즉 비매품)을 1만원씩 받고 판다.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인간이 학생들 죽도록 작업해서 번역서 만들어 주니 교정용으로 출판사에서 받아온 책자를 학생들에게 팔아먹는다.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그 책자를 사야 했다. 도제관계에선 그러해야 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교원대 교육학과가 이런 곳이었다. 물론 과거시제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사회적 지탄과 불신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교육부장관 후보자 문제는 현재시제다. 이 문제의 후보자가 바로 이 문제 대학원의 교육학과 출신이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최근 언론에 터뜨린 어느 교사의 양심선언은 99.9% 진실일 것 같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2014년 7월에 쓴 글인데, 이 시기에 교원대 김명수 교수가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장관 후보로 낙점이 되어 청문회 검증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졌던 터였다. 결국 김 교수는 견디다 못해 사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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