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엔 다른 학교에 있는 것이 없고, 반대로 다른 학교에 없는 게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우리 학교엔 ‘치맛바람’이 없는 대신 ‘학부모의 참여도’는 굉장히 높다. 교사에 따라 다부초의 이러한 진풍경을 불편해 하는 교사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학부모가 학교교육에 관심을 많이 갖고 참여하는 것을 환영하는 교사는 그리 많지 않다.
교원 복무와 관련하여, 우리 학교 교사들은 페이퍼워크로부터 자유롭다. 공문 처리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문 양이 그리 많지 않고 공문을 빼면, 쓸데없는 교육실적물 생산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들이 부러워 할 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학교에는 ‘교직원 다모임’이라는 이름의 교사협의 시간을 매우 많이 갖는 편이다. 많은 선생님들이 이 과도한(?) 토론문화에 혀를 내두르신다.
학교를 이끌어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도 선생님들의 그러한 반응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사실이다. 상대방이 싫다는 걸 억지로 권고하며 같이 데려가고자 하는 입장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우리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걸 하지 않으면 우리가 꿈꾸는 학교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회의에선 “원어민 교사의 투입 학년을 기존 6학년에서 3학년으로 바꾸는 문제”로 1시간 가까이 토론을 펼쳤다. 1주일에 한 번 순회 근무로 오는 원어민 교사에게 배정된 수업시수가 3시간인 관계로 3~6학년 가운데 어느 한 학년은 혜택을 못 보게 되어 있다. 1학기엔 3학년을 제외한 4~6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는데, 2학기부터는 6학년 대신 3학년 수업에 투입시키는 게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사실 수업의 효과를 생각할 때, 6학년 보다는 3학년이 더 효율적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갑론을박 끝에 결국, 원래대로 유지하기로 결론을 냈다.
그랬더니, (아마도 우리 학교의 과도한? 토론문화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 “결국 원래대로네요!”
우리가 느끼기로 이 말의 뉘앙스는 “이럴 것 같으면 1시간 동안 헛수고 한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과연 그럴까?
이건 ‘결과중심 관점’의 전형이다. 일반학교에서 그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척척 해내는 데 익숙한 교사들이 우리 학교의 별난(?) 토론문화에 이런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곤 한다.
계에서 전달하고 교감/교장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고 학년부장은 학급교사를 쥐어짜고, 학급담임은 학생들을 쥐어짜서 위에서 요구하는 “결과물”을 맹글어 내는 게 보편적인 교사들의 교육실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전문직 종사자의 자화상일 수 있는 것일까?
직원협의회라 하는데, “협의(協議)”가 있는가? 지시와 전달 밖에 없는 게 협의일 수 있는가?
1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 끝에 기존안대로 결론을 내렸으면 헛수고 한 것일까?
그래!
일반 학교에선 이러한 헛수고(?)를 피하기 위해 담당자가 학교장의 결재를 받아 완성된 결론을 전체 교사들에게 전달하고 교사들은 그저 따르기만 한다.
그런데, 이게 회의가 아닌 것은 둘째 치고 교육 발전이란 측면에서 효율적이지도 않다.
나침반은 언제나 좌우로 요동치다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한 곳을 가리킨다.
우리가 나침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좌우로 요동 친 다음 어떤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처음부터 한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 난 나침반인 것이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하는 것은 회의가 아니다. 그런 비지성적인 집단문화는 효율성도 없을뿐더러 조직의 발전이나 구성원의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1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헛수고’가 아니다. 그 자체로 그 집단의 건강성을 대변하며...... 무엇보다 그로 인해 개인이 성장한다. 교사의 성장 없이는 학교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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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탄해 마지않는다.
나보다 훨씬 젊은 교사들이 자신의 성장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회의 횟수나 시간량을 줄이자고 주장하면서 그 잉여시간에 컴터 앞에 앉아 웹서핑 하거나 비슷한 사람끼리 삼삼오오 모여 무익한 잡담 나누는 “소모적인” 일상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슬프고 또 분노마저 치밀어 오른다.
모레 강의 준비하다가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서 만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인간다운 삶은 occupation이 아닌 preoccupation이어야 한다”는......
번역서에선 이를 ‘해야 할 일’이 아닌 ‘전념해야 할 일’이어야 한다...로 옮기고 있지만, 내가 역자라면... "먹고 사는 일(occupation 직업이라는 의미도 있음)이 아니라 자신을 던지는 일이어야 한다" 라고 옮기겠다.
물론, 우리 하는 짓이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그게 전부인 삶이 ‘개돼지의 삶’이다.
프레이리의 말대로 인간의 삶, 교육자의 삶은 그것 이상이어야 한다.
가치문제에 치열하게 뛰어드는 것(preoccupation). 이러한 사상행위가 없으면 교육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교육자가 아니라 그저 지식기능공일 뿐이고, 그런 곳은 학교가 아니라 공장이다.
201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