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초 이야기

우유곽 문제

리틀윙 2017. 2. 26. 21:49

5.23. 교직원다모임(직원회의) 결과 정리

 

어제 회의는 학생생활 지도와 관련하여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 아이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고 교사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말 자유롭게 하는 모습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한편, 그 이면에 있는 역기능에 대해서도 문제인식을 공유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략 무질서, 주의력 결핍, 배려심 부족 혹은 공격성 따위로 좁혀지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노력으로 우유곽 가지런히 놓기에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 의견을 모았습니다.

 

- 앞 부분 생략 -

 

우유곽을 가지런히 놓게 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차분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 1층부터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며 하모니의 가치’, ‘협동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1) 자기가 먹은 우유곽을 정성껏 정육면체로 만들어 학급바구니에 담습니다(개인적 차원)

2) 우유당번은 학급 전체 우유곽을 확인하고 현관 앞 우유박스에 가지런히 옮겨 놓습니다(학급차원의 노력)

3) 앞의 어느 학년이 가지런히 놓은 우유곽 위에 자기 학년의 우유곽을 가지런히 놓아가면서 모두가 협동할 때 그 조화미와 협력의 가치를 모두가 느껴갑니다(전체 공동체 차원)

 

이 이치가 지난 주 (외람된 강의 때) 제가 말씀드린 내용과 형식의 통일입니다.

우유곽 바르게 놓고 안 놓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극히 형식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형식적인 문제에서 교사-교사, 교사-학생, 학생-학생 사이에 협응이 이루어져 기존의 산만한 형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학교 문화(=내용)를 경작해 가는 겁니다.

형식과 내용은 함께 나아가는 겁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내용이 더 중요하지만, 때론 그릇된 형식은 그릇된 내용을 파생시키기에 형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습관의 뜰을 지나 이성의 궁전에 도달할 수 있다(R.S. Peters)”고 합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습관을 지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함께 했던 뜻 깊은 토론이었다고 자평해 봅니다.

 

차이의 존중 속에 치열한 토론, 우리 다부의 자랑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유곽 문제는 아마도 혁신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집단이라면 한번쯤 고민하거나 치열한 격론을 벌였을 법한 상징적인 이슈일 것이다.

이에 대해, 보수적 시각을 가진 분이라면 그것은 하등의 갈등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우유곽 가지런히 놓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바로 그러한 보수적인 시각에 대한 반발로 왜 우유곽을 반듯하게 놓게 해야 하는가? 그건 획일성을 강제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은 항상 구체적으로접근할 일이다.

평소 획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는 네 멋대로!”의 정신은 필요하다. 모범적인 삶 밖에 모르는 아이에겐 일탈은 권장되어야 할 미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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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시를 가르치는 키팅 선생이 느닷없이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데려가 제식훈련을 시킨다. “왼발, 왼발, 번호 붙여 갓!”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네 멋대로 걸어!”라는 명령을 내리고 아이들은 각자 자유롭게 스텝을 밟으며 모종의 카오스를 즐긴다.

이를 통해 키팅 선생이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시를 이렇게 쓰라는 것이다. , 운율이니 뭐니 하는 형식을 다 때려치우고 네 꼴리는대로시를 쓰라는 것이다.

키팅은 이러한 형식 탈피의 지론을 강조하며 이 영화에서 유명한 한 장면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시학 이론서를 잡아 찢게 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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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볼 때 이건 아니다. 내용미와 형식미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시라면 말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선 형식미를 만들어내는 원리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내용과 형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듯이,

자율과 책임, 유희와 질서, 발랄함과 예의, 자기주장과 배려, 자존감과 겸손, 욕구와 인내... 등의 양극 대립적 가치들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양극성(bipolarity) 가운데 어느 한 쪽도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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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로 날개짓을 번갈아가며 균형을 잡아간다.

아쉽게도 진보진영에서 이 말은 극심하게 우편향 된 우리 사회의 보수적 정서에 대한 안티테제로 내세울 뿐, 이 이치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 자신의 좌편향적 오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그런 심각한 오류를 목도한다.

즐거운 배움과 행복한 나눔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도, 즐거움만 있고 진지한 배움은 좀처럼 보기 힘들고, (개인적) 행복감은 넘쳐나건만 (공동체적) 나눔은 잘 없다.

이 학교만큼 공동체적 가치를 강조하는 학교도 나는 못 봤고, 이 학교 아이들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들도 나는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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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이 학교가 한국사회의 어떠한 초등학교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가 발휘하는 빛나는 순기능이 있다.

 

첫째, 총체적으로 우편향 되고 길들여진 사회에서, 비록 싸가지 없을지라도 순응적이지 않은 인간, 야생마 같은 인간은 그가 어떤 지적/정서적 역량을 지니든 사회적으로 일정한 순기능을 할 것으로 믿는다.

 

둘째, 지적인 성장과 무관하게, 어린 아이가 학교에서 실컷 뛰어 놀며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이다.

 

셋째, 이곳에선 최소한 병든 아이’, ‘영혼이 망가진 아이는 없다. 인근 대구의 학교에서 적응 못한 아이들이 이곳으로 전학 와서 행복감을 느끼며 일상을 영위해 간다. 우리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다. 이 보다 더 훌륭한 교육적 성과가 없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이 모든 순기능적 측면이나 성과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결과이지, 교사가 의도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 점이다. , 이것은 시스템의 위력이지 사람의 노력의 산물은 아니다. 하긴 이 시스템을 만들고 구동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이 말은 어떤 면에서 모순이긴 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훌륭한 시스템에 교육주체가 최선을 다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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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리 학교 교훈으로 돌아가자.

즐거운 배움과 행복한 나눔

 

즐거움과 개인적 행복은 있으되 진지한 배움과 공동체적 나눔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반 학교에선 이 둘 다 없지 않은가? 시험 점수 잘 받는 게 진정한 배움은 아니다. 그리고 공동체와 개인 모두가 행복을 못 느끼는 것에 비해 학업 스트레스 받지 않고 실컷 뛰어 놀며 개인적으로 행복감을 느껴간다면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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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과 책임, 유희와 질서, 발랄함과 예의, 자기주장과 배려, 자존감과 겸손, 욕구와 인내... 이 양극 대립쌍에서 두 가치를 동시에 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각 대립쌍에서 후자의 보수적 가치밖에 준비 되지 않는 일반학교에선 이게 거의 불가능하지만, 전자의 진보적 가치를 누리는 학교에선 교육 주체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후자의 보수적 가치에 염증을 느낀 반작용으로 전자의 진보적 가치에 편향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쉽지 않은 지난한 과업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어려운 과업이기에 땀 흘리는 보람이 있는 것 아닌가?

 

2016.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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