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잔혹동시에 대한 단상

리틀윙 2015. 5. 10. 13:24

동시가 어른들에게 감흥을 주는 것은 어떤 요소들일까요? 그 외연을 나열해봅시다.

어린아이 특유의 순박함, 풋풋한 정서, 어른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사고,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세계 따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른의 글도 그래야 하거늘(명작이라 하는 것들 가운데 그러하지 않은 것이 많죠), 아이의 글이 진실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이고 천재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원숭이 재주부리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진실성의 토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삶인 거죠. 삶에서 겪은 비상한 경험이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창작활동으로 연결되고 사회적으로 공유될 때 감동을 연출하는 겁니다. 자기 삶과 동떨어진 관념 속에서 그려낸 무엇은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난들 사기에 불과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중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해 가는데 술 익는 마을마다어쩌고 한 박목월의 시가 그런 예죠.

초등교육자로서 저는 아이들의 시에서도 자기 삶과 유리된 관념적 놀음의 흔적을 자주 접합니다. 아니 대부분의 아이들의 시가 이러합니다. 이건 아이들 잘못이 아니라 교육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데(특히 평가나 대회가 아이들을 이렇게 만듭니다), 아이들 머릿속엔 삶 따로 공부 따로라는 공식이 확 박혀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학원가기 싫은 날은 어떨까요?

나는 이 시를 쓴 아이의 삶과 이 시의 내용에 있어 그 사실성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우선, 시의 전문을 살펴봅시다.

 

............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

 

사람을 씹어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는 것도 부족해 눈깔까지 파먹고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머리채도 쥐 뜯어 버리는데,

이 잔혹 행위의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더라도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말고 쿨하게 그 눈물을 핥아 버리고, 심장은 가장 고통스럽게 갉아 먹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 전대미문의 잔혹한 카니발리즘을 표현한 작품의 주인은 사드 후작이 아닌 초등학생입니다.

작품 속 행위의 주체 또한 찰스 맨슨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어린 아이입니다.

더구나! 그 잔혹한 살육의 객체는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이 과도하게 불편한 시가 그나마 세인들에게 어필할 때는, ‘학원가기가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런 끔찍한 발상을 품었을까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잔혹한 동시를 낳게 한 것은 더 잔혹한 한국사회의 실상(reality)이라 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어제 글에서 적었듯이) 아이의 어머니는 한국사회의 교육을 망치는(?) 그렇고 그런 옆집 아줌마가 아니라 선진된 의식의 소유자입니다. 시인이라는 점과 자신이 망가질 것을 감수하고 아이의 시적 상상력을 존중하여 과감히 출판하게 한 점을 생각할 때 그런 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제 글 쓴 뒤에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아이는 1주일에 두 번 영어학원 밖에 안 다녔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행 교육과정상 초등학생은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학교공부조차 따라가기 힘든 것은 굳이 교사가 아니라도 웬만한 학부모들은 다 압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옆집아줌마가 망친다고 하는데, 1주일에 두 번 영어학원만 보내는 엄마라면 옆집아줌마로부터 당신 뭘 믿고 아이를 그렇게 방치하냐는 핀잔을 들을 부모이지, 어린 자녀로부터 그런 잔혹한 상상력의 대상이 될 부모와는 완전 거리가 멉니다. 다시 말해, 아이의 가정은 아동학대는커녕 지극히 정상적인 환경이며 아이의 어머니는 평균 이상으로 이상적인 모성애를 실천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아이가 자기 부모를 잔혹하게 죽이고 싶은 욕구가 일 경우는 딱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사이코패스이거나 심각한 아동학대의 피해자일 경우. 그러나 아이의 경우는 이 두 가지 경우와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3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데... 어제 제 글 말미에서 언급했지만, 이건 불장난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글쓴이 : 얘야, 너는 그런 경험을 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 시를 지었니?

아이 :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나는 그냥 심심풀이로 그래 본 것뿐인데???

아이의 부모 : 우리 아이가 그런 생각을 품었다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아이의 고통을 대변해서 그런 생생한 표현을 해본 것으로 이해해 주세요.

 

말이 안 됩니다.

 

첫째, 마르크스나 체 게바라도 아니고 초딩 아이가 무슨 자기실존과 무관한 초딩 보편의 해방적 아젠다를 시적으로 표현합니까?

만약 그럴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아이라면, “현실적으로한국사회에서 그게 어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결과적으로 자신과 부모가 어떻게 망가질 것인가도 예측해야죠.

 

둘째, 천재 초딩으로서 초딩 보편의 고뇌와 울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면, 보편적인 초등 아이들이 그 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의 보편적인 정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엄마는 엄마입니다. 이 세상에 씹어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는 것도 부족해 그 흐르는 눈물마저 냉담하게 핥아 마시고 싶은생각이 드는 엄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른의 경우는 선량한 사람이라도 특정 인간에 대해 갈아 마시고 싶을잔혹한 충동이 일 때가 있을 겁니다. 영화 <26> 속의 주인공들이 살인마 전두환을 향해 품듯이, 세월호의 희생자 부모들이 어떤 대상을 향해 품듯이 사람이 때로는 한 인간에 대해 갈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잔혹한 감정은 초등아이에게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등아이의 삶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원한관계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에게 말이죠.

 

아이들은 설령 자신이 아무리 미워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잔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매우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그런 시를 쓴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순수한 자발성에 터해, 그것도 자기 경험과 전혀 무관한 입장에서 그 시를 썼다면, 그 아이는 심각한 정신치료를 요하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법이죠. 따라서 나는 이 막장 카니발리즘이 전적으로 그 시인 어머니가 부추긴 결과라 생각합니다. 제 자의적인 생각일 수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아이가 그런 표현을 하기 전에 시인인 엄마에게 자문을 구했을 겁니다.

아이 : 엄마, 이런 표현도 괜찮을까?

엄마 : 괜찮다. 더 심한 것도 얼마든지 괜찮다. 네 멋대로 떠오르는 대로 쓰렴.

 

예전에 초등 3학년 학생들을 통제 못해 학급이 연일 무정부상태로 흐르는 교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소란스러워 그 교실을 가보면, 교사는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처리에 바쁘고 아이들은 수업시간임에도 왔다 갔다 장난을 치며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때론 녀석들이 선생님과 11 겨루기 자세를 취하며 한 판 붙자라는 비범한 저항의지(?)를 표명하기도 한다는 황당한 소문도 들려오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카오스가 빚어지는 유일무이한 원인은 담임교사의 특별한 성정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너무 착한 여교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해에 제가 영어전담을 하면서 이 학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제가 경험한 동일 학년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굉장히 착한 편이라는 겁니다.

 

이게 아이들입니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나 명분이 아닌 구체적인 어른의 자극(S)에 따라 구체적으로 반응(R)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강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 여러 군데 학원을 다니며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아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런 상상을 품지 않을 겁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피아제가 말하는 자기중심적(egocentric) 속성이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아이는 본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서 자신의 행동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은 못합니다. 아이가 재롱부리는 것을 재밌다고 귀엽다고 호응하면 아이는 때론 도를 지나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나 발언을 일삼습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 보고 바보 똥개야하는 것이죠. 그런 때엔 어른의 통제가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행동을 수정하죠.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 이 필수불가결한 통제를 간과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긴 결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잔혹동시 사태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그 한 편의 시만 빼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널리 읽히게끔 출판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모의 무모한 판단이 너무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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