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어떤 비판

리틀윙 2015. 11. 27. 07:30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573322.html

 

최근 법륜의 글에 대한 저의 거친 비판글에 제 페친들과 페친의 페친 분들께서 댓글 달아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글입니다.

법륜 스님에 남다른 애정과 존경심을 품고 계시는 분들에겐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원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봐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어떤 비상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댓글 다신 분들의 말씀은 이해합니다. 법륜도 그저 그렇게 소박하게 말씀 주셨다면 제가 이러진 않을 겁니다.
법륜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여러분의 글귀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설법으로 요약됩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관념론이 지니고 있는 주관주의적 오류에 대해서는 별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내 경험상 주관주의가 유용한 경우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객관주의에 경도된 무리들, 즉 물적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으니 모조리 갈아엎어야 한다는 좌경종파주의자들을 비판할 때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인간의 의지는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기계론적 객관주의와 마찬가지로 관념론적 주관주의 또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법륜 글 속에 나오는 피해자의 심상이 원효의 해골물에 비유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법륜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나는 경악해 마지않습니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그 생각이 나를 더러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껴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추행을 당했는지 사랑을 받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 보다는, 잊어버리거나 용서하는 편이,,,, 피해자의 행복을 위해 더 좋지 않을까요? --- 페친 분들의 댓글

 

동의합니다. 단, 이 또한 구체적으론 논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륜이든 누구든 피해자 앞에서 ‘용서’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적어도 그런 말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실물적인 아픔을 치열하게 추체험 한 뒤에 내뱉을 일입니다.

나 같으면 실컷 증오하라고 하겠습니다. 용서란 것은 그 뒤에 오는 겁니다. 피해자가 얼마나 젊은지, 그 끔찍한 고통이 종료된 시점으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마음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데, 용서를 주문하는 것은 무책임한 위선이고 폭력입니다.
그 보다는 피해자의 마음이 정화될 때까지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는" 마음으로 피해자를 위로하는 게 우선될 일입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그런 사람만이 피해자에게 던질 수 있는 화두라 봅니다. 미안하지만, 법륜도 또 그를 지지하는 여러분도 그런 단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겨레 글의 배경으로 걸린 사진이 빈센트의 ‘슬픔 Sorrow’입니다.
그림 속의 모델은 임신한 창녀입니다.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한 창녀의 심사가 슬픔 그 자체인 거죠. 여성은 그 몸으로 손님을 못 받을 것이니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도 힘들 겁니다. 그런 절망이 그녀의 ‘슬픔’의 한 축을 차지하는 거죠.

이런 여성 앞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려 있다.” 어쩌구 떠들면, 그 자는 개새끼입니다!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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