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나와 너

리틀윙 2014. 10. 26. 21:11

인간 대 인간의 따뜻한 관계성을 주제로 한 괜찮은 영화 <허수아비 Scarecrow, 1973>로 이야기를 열고자 합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사회에서 별 존재감 없는 두 남자가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우연히 만납니다. 로드무비의 한 주인공 맥스(진 해크먼 분)는 감옥에서 갓 출소해 세차장을 차릴 꿈으로 피츠버그로 향하는 중이고 다른 주인공 라이언(알 파치노 분)5년의 세월을 바다에서 보낸 뒤 자신의 아들을 찾으러 먼 길을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성격이 정반대입니다. 맥스는 다혈질에 호전적이어서 툭하면 싸움을 일삼는 반면 라이언은 소심하고 연약한 성격입니다.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깊어 가는데 놀랍게도 서로가 서로를 닮아갑니다. 그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 허수아비입니다. 라이언은 까마귀가 허수아비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스워 한다고 믿습니다. 이로부터 체구가 왜소하고 심약한 자신이 험악한 인생살이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생존법인 허수아비 철학을 정립하는데, 라이언은 분쟁이 벌어질 때 허수아비 노릇을 하여 상대방을 웃게 만듦으로서 싸움을 피합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장면인 술집에서 또 다시 맥스가 싸움을 벌이려는 상황에서, 말리다 지친 라이언이 맥스와 결별을 선언하고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맥스가 싸움 상대에게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를 껴안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라이언에게서 배운 허수아비 책략으로 상대를 웃게 만들면서 싸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장내에 감돌았던 일촉즉발의 전운은 맥스가 보여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스트립쇼 그렇다고 홀딱 벗는 것은 아닙니다^^)로 인해 일순간에 웃음바다로 변합니다. 평소 성마른 태도에 웃을 줄 모르고 늘 심각한 인상을 짓던 맥스가 이렇듯 사람이 달라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마르틴 부버가 지적했듯이 나와 너 I And Thou’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짝말(word pair)입니다. 나의 존재는 너로 말미암고 너의 존재는 나로 말미암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식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닮아갑니다. -너 관계가 두 당사자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선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관계맺음처럼 서로 차별적인 속성을 지닌 만남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늘 자기와 친한 친구, 자신과 같은 성별에 비슷한 성향의 또래를 선호하죠. 당연한 현상입니다만, 학급 내의 사회적 일상이 고착된 친소관계에 따라 돌아간다면 반드시 크고 작은 역기능이 초래되고 맙니다. 역기능도 역기능이지만, -너 관계에서 에게 없는 장점을 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됩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 상호간의 관계가 서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학급내의 사회적 관계망을 조율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성장의 문제는 결국 균형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교교육의 궁극 목표인 전인적 발달이란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신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위해 학교교육은 지식교육과 예능교육, 신체활동과 예술활동을 균형 있게 추구해가야 합니다. 기실, 한 인간의 자질 혹은 역량은 이 대립쌍의 통합(unity of opposites)으로 결정지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균형 잡힌 인격이란 측면에서 한 인간에게 결여되기 쉬운 가장 보편적인 자질은 성별에 따른 불균형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나-너 관계는 여성-남성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남자 아이에게는 섬세함과 배려의 자질이, 여자 아이에게는 대범함과 자율성이 결여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교사는 좌석배치나 소집단 구성에 있어 남녀 성별을 적당히 짝 지움으로써 남성성과 여성성의 접속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성역할 혹은 성정체성과 관련하여 가장 바람직한 성향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 형태인 양성성(androgyny)입니다. 성역할이론의 권위자로서 유명한 성역할목록 BSRI(Bem Sex Role Inventory)의 창시자이기도 한 산드라 벰(Bem, S. L.)은 양성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더 잘 적응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1500명의 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연구 결과,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고로, 이 연구의 시공간적 배경은 1970년대 미국사회인데, 이 시기 미국인들의 성역할 감수성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벰의 연구결과가 현재의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하겠습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성인은 자기주장과 독립성 그리고 강한 자립심을 지닐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여성상은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식의 삶을 영위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한편으로, 성인은 이웃과 원활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욕구나 그들 행복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때론 그들에게 정서적으로 기댈 필요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남성상에 따르면 이러한 삶의 방식은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들이 취하기 어렵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성성을 통해 우리는 독립성과 유연성, 자기주장과 양보심,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 따라서 양성성을 지닌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반경을 최대한 펼칠 수 있으며 다양한 상황 하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해갈 수 있다.주1)

 

남성성-여성성의 관계는 꼭 생물학적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허수아비>에서 보듯이, 동성의 친구끼리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에게 없는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자질을 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는데, 다만 양 성향 가운데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속에 나와 너라는 상반된 두 속성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통합성 철학의 대가 헤겔은 이를 두 자기의식의 대립이라 하였습니다. 나 속에 내재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상호대립적인 두 자기의식이 치열한 갈등을 통해 내적으로 통일될 때 비로소 바람직한 인성이 형성됩니다. 인성교육이란 측면에서 교사가 할 일은 개별 학생의 정체성을 파악하여 남성성 혹은 여성성에 치우침이 있는 학생의 성향이 평형을 이루도록 조절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심각한 문제의 치유책으로 지금 논하는 남성성-여성성의 균형에 주목할 것을 제안해 봅니다. 폭력 피해 학생들이 남성적 성향을, 가해 학생들이 여성적인 감수성을 학습한다면 그런 끔찍한 불상사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 실례로, 한 여중학교에서 또래들을 상대로 폭행과 금품 갈취를 저지르던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역할을 맡겼더니 그 아이들의 심성과 태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습니다.(2013.5.13. KNN 뉴스)

 

헤겔에 의하면 존재의 본질은 모순입니다. 현재의 를 유지하려는 속성(being, 존재)를 부정하려는 속성(nothing, )이 상호 대립하여 새로운 를 생성(becoming, 생성)해 갑니다. 관계맺음에서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이 같은 대립적 속성들은 개인 내의 두 자기의식에서뿐만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러시아 사상가 바흐친(Bakhtin, M.)은 이를 집중과 분화의 통합이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주2) 바흐친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과정은 집중력(the centripetal)과 분화력(the centrifugal)라는 대립되는 두 성질 사이의 모순과 긴장의 산물입니다. 집중-분화에 해당하는 원어 ‘centripetal-centrifugal’구심력-원심력을 뜻합니다. 물체의 원운동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통합에 의해 평형을 유지하듯이 인간관계 또한 그렇게 이루어져 간다는 뜻이겠죠. ‘구심력이란 현재의 혹은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뜻하는 것으로서 헤겔 용어로 ‘being’에 해당하고, ‘원심력은 현재의 혹은 기존 관계를 부정하려는 것으로 ‘nothing’에 해당합니다. 바흐친에 따르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는 두 당사자 사이에 융합(집중)과 아울러 분화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분화에 비해 집중이 강한 관계맺음은 독재’, 그 반대의 경우는 무정부로 흐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실에서 교사-학생이 맺는 관계맺음이 대개 이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의 모습을 띱니다.

앞서 언급한 마르틴 부버나 프레이리의 대화적 관계(dialogical relationship)’와 달리 바흐친의 대화적 관계에서는 -의 대립을 중요시 여깁니다. 제가 역설하는 교육의 본질, 교육은 관계다라 할 때, 그 관계는 모순이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순 혹은 대립을 통해 서로가 발전하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경험한 한 사례를 말해보겠습니다.

10여 년 전 4학년 담임을 맡을 때의 일입니다. 학교 규모가 매우 커서 1개 학년의 학급 수가 10개쯤 되었고 급당 학생 수도 40명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혈기왕성하던 때라 그 때 저는 아이들을 남성적 방식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런 한편, 음악에 약간은 남다른 감각과 소질을 지닌 제 장점을 살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와 게임을 가르치며 나름 창의적인 학급경영을 해갔습니다. 그때껏 저는 제가 꾸려가는 학급살이에서 반 아이들이 대부분 만족할 것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 아이의 어머니께서 교실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아이가 저의 방식에 적응을 잘 못해 걱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분의 문제인식은 일방적으로 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저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고 계셨습니다. 말씀인 즉, 자신의 아파트에 우리 반에 속한 남자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모두 새 담임선생님이 너무 재미있고 좋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니 그 아이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줄곧 여선생님 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여성적이면서 내향적인 성향의 소유자였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점차 제 방식에 적응을 하면서 자신의 성격도 조금씩 변화해 갔습니다. 말하자면, 저의 남성성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 때 저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 제게 문제가 있음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건대, 저의 리더십은 마초이즘에 가까웠고 그런 방식으로 인해 힘겨워 했을 아이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떨쳐내기가 힘듭니다. 뒤늦으나마 저의 이런 성찰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지금 언급하는 그 아이와의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아이와의 관계맺음은 내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끝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포츠 영웅 김연아의 이야기로 -너 관계의 의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김연아와 늘 함께 거론되는 일본 피겨 스케이터로 아사다 마오가 있죠. 김연아 하면 아사다 마오, 아사다 마오 하면 김연아를 떠올릴 만큼 둘은 숙명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했는데, 4년 전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밴쿠버 올림픽을 기점으로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에게 조금씩 밀리는 형세였지만 둘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밴쿠버 바로 앞에 열린 토리노 올림픽 때만 하더라도 여자 피겨스케이터로서 아사다 마오에 필적하는 선수가 없었습니다. 마오는 세계 최강이었지만 당시 그녀는 15세로서 16세 이상 출전하는 나이 제한에 걸려 출전을 못했습니다.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는 둘 다 나이와 태어난 달이 같을 정도로 피겨 인생을 같이 했는데, 토리노 때만 하더라도 김연아의 기량은 아사다 마오에 한참 못 미쳤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이 참 무심하시다. 왜 내가 저 애랑 같은 시대에 태어나게 했을까하는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듯이, 지금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를 뛰어 넘어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아사다 마오가 없었다면 오늘의 김연아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사다가 없는 연아, 연아 없는 아사다는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서로는 어쩌면 소름끼칠 정도로 치열한 경쟁 상대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해갈 수 있었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소치 올림픽에선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두 사람 모두 정상에 서지는 못했지만 연기를 마친 뒤 진한 형제애를 발휘하며 서로의 마지막을 축복하는 훈훈한 모습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성장해가는 것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적 성장이든 인간됨의 성장이든 나와 너는 서로가 서로를 디딤돌 삼아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성장의 오솔길을 혼자 걷는다면 힘이 나지 않을뿐더러 동기부여도 되지 않을 겁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혼자 뛸 때는 여럿이 뛸 때보다 기록이 안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른 경쟁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주는 대화적 관계가 되도록 학교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와 다른 가 있음이 우울한 현실이 아니라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희망의 교육공동체를 꿈 꿉니다.

 

 

주1) Conger, J. J., Adolescence and Youth(1977: 153)

주2) Bakhtin, M. M., The Dialogic Imagination(1981: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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