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학생 평가에 관한 고민

리틀윙 2014. 11. 4. 19:49

  학기말을 맞아 생활기록부에 학생 발달 사항에 대해 그간 교사의 눈으로 관찰하고 측정해온 결과를 입력하면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옵니다. ‘이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 만물의 기본 속성이죠.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평가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변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변하기 때문에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금언은 개인의 자질 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수행평가라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정삼각형 그리기라는 평가문항에서, 5월 평가시점에는 성취기준에 도달했던 학생이 학기말인 지금도 그러하리라는 보증이 있을까요? 안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영어 같은 교과에서는 3월초 1단원에서 익힌 단원 핵심문장을 학기말에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 평가 시점에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학기말에는 도달해 있는 학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학생의 평가결과는 미흡으로 매겨져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기록되고, 학기말 또는 학년말 통지표에 (   )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정삼각형 그리기 능력이 미흡함으로 학부모에게 통보됩니다.

학생 평가와 관련하여 이러한 불합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존의 평가체제가 현재의 학생 발달 수준에 초점을 맞춰 치러지는 정적 평가(static assessment)’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비고츠키 학자들에 의해 연구·개발해오고 있는 역동적 평가(dynamic assessment)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동적 평가와 정적 평가가 어떻게 다른지, 정적 평가에 비해 역동적 평가가 어떤 장점이 있는지 기성 이론에 제 생각을 곁들여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역동적이니 정적이니 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어 유의해야 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역동적이라 함은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는이란 뜻이고 정적은 그 반대의 상태인 고요한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역동적 평가정적 평가는 활발함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역동적이란 움직이는 성질 즉, 운동성을 말하고 정적이란 운동성이 결여된 상태로서 정지된또는 고정된의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둘의 차이는 동영상과 스틸 사진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정적 평가는 특정 시점에 산출된 학생의 일시적 역량을 측정하는 점에서 매우 협소한 정보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반면, 역동적 평가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서 학생의 점진적 발달 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합니다. 헤겔은 진리는 전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인간적 자질이든 지적·심동적 역량이든 한 인간의 진면목에 대한 평가는 오직 역동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정적 평가는 어린 학생이 성인의 지원과 보조 없이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만을 측정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발달된 역량을 측정하는데, 비고츠키 학자들은 이런 평가는 근접발달영역의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 정보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학생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역동적 평가는 학생의 독립적 수행 능력과 지원을 받아 할 수 있는 능력 모두를 밝혀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측정할 때만이 올바른 평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실감나는 한 예로 보드로바&리옹(p.92)은 평균대 위를 걷는 능력에 관한 두 여자 아이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아이는 모두 혼자 힘으로는 평균대를 걷지 못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는 교사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지만 다른 아이는 교사의 도움을 받고서도 걷지 못합니다. 현재의 독립적 수행능력만을 측정하는 정적 평가에 따르면 두 아이 모두 수행능력이 제로에 해당하겠지만 역동적 평가 결과는 다릅니다. 상식적으로 두 아이를 동일하게 0점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죠. 이처럼 역동적 평가는 상식에 보다 가까운 처방이라 하겠습니다.

정적 평가는 학생의 독립적인 역량을 측정하기 때문에 학생 상호간은 물론 학생과 교사의 여타한 상호작용까지도 차단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학생이 시험 문제의 뜻을 몰라서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도 금기시하곤 합니다.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평가라면 몰라도 초등학교에서 그런 점이 공정성 시비로 거론되는 자체로 그 평가 방식은 교육적이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사실, 평가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은 아이들의 일상생활에서 잘 접하기 힘든 낯선 문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시험 문제를 많이 풀어 보지 않은 어린 학생들은 문제의 뜻을 몰라서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동적 평가에서는 학생이 지닌 학습 잠재력을 어떻게든 최대한 펼치도록 돕기 때문에 공정성의 시비가 발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학습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호한 물음으로 그들이 지닌 심층적인 잠재적 능력을 측정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역동적 평가도 몇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닙니다. 그 가장 큰 난점은 교육실천 상 실행의 어려움입니다. 역동적 평가는 IEP(학생 개별화 교육프로그램)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특수교육 영역 외의 일반학급에서는 전면적인 실행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또한 학계에서는 역동적 평가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읽기와 쓰기의 국한된 영역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습니다.(보드로바&리옹, 앞의 책 p.376)

그럼에도 비고츠키 학자들이 제안하는 역동적 평가 개념은 우리 학교 교육의 담지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따라서 현장 교육주체들이 역동적 평가의 의의를 되새기며 단위학교 또는 교실 차원에서 실현가능 영역을 점차 확대해가며 실천하려는 의지와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평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상식적으로(,) 평가가 교육을 위해 존재하지 교육이 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래의 평가 체제에서는 이게 거꾸로 돌아갑니다. 학교에서 실행하는 대부분의 시험은 시험 출제자인 교사와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 간에 펼치는 집요한 숨바꼭질과도 같습니다. 선발을 목적으로 삼는 공무원 취업시험 따위라면 몰라도, 학교 평가에서 교사가 시험 문제 속에 답을 꼭꼭 숨겨 두고 학생이 힘겹게 정답을 찾는 식은 교육적으로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평가는 그것을 통해 교사와 학생에게 더 나은 교수-학습 활동을 위한 계기로 작용할 때만 교육적 의미를 갖습니다. 학생의 서열을 매겨 불필요한 경쟁을 조장하는 시험이나 학습력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학생들을 주눅 들게 하는 시험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학업 대열에서 낙오된 학생들에게 문제 해결 의지와 성취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교육적 처방으로 최소 수준이나마 개별화에 기반한 역동적 평가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러한 평가 과정을 통해 학생은 교사의 도움을 받아 근접발달영역을 점진적으로 향상시켜갈 수 있으며, 교사 또한 개별 학생에게 특정 시점에 필요한 유용한 교수전략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평가를 통해 학생과 교사가 함께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역동적 평가가 자리하기 위해서는 학력배움에 관한 건강한 개념이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배움목적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계에서 학생들이 가장 적게 공부를 하고서도 가장 우수한 학력을 자랑하는 핀란드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구하고 구성해가는 것에 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핀란드 교육위원회는 PISA에서 높은 성적을 낸 이유로 사회 구성주의 학습 개념을 들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나 한국의 지식 우선을 표방하는 교육관과는 크게 다릅니다.사회 구성주의 socio-constructivism’란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의미합니다. ‘사회란 말은 과 동의어로 봐도 무방합니다. 아동은 현재의 삶에서 부모나 교사,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의 의미를 구성해갑니다. 핀란드 학생들은 늘 이것은 정말 배워야 할 지식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고 합니다. “공부는 왜 하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시험에 나오니까.” 라는 말은 핀란드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동이 스스로 선택하여 터득한 지식은 그대로 미래의 사회적 삶을 헤쳐 나가는 데 유용한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학교에서의 공부와 사회에서의 삶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평가 또한 아동의 현재와 미래의 사회적 삶에 의미를 갖는 형태여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시험 문항은 어떤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다음 중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로 잘못 된 것은?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땀을 흡수하기 위해 추위를 막기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기서 요구하는 정답은 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옷가게에서 옷 고를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어린 학생들도 이 같은 이치를 뻔히 알지만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이 다르다는 것도 압니다. 삶과 공부가 따로 돌아가는 것이죠. 이건 결코 예외적이거나 극단적인 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이름으로 우리 학교에서 치르는 수많은 시험지들이 저런 식의 찍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 잘 한다는 것은 시험을 잘 치는 것을 의미하며 시험 잘 친다는 것은 정답을 척척 잘 골라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삶에 만나는 문제들이 다음 중 ~가 아닌 것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애플이나 삼성이라는 기업의 명운이 사원들의 찍기 능력으로 좌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지적 역량이라 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창의적 사고에 방해되는 점에서 지탄의 대상이 될 겁니다.

평가는 교육을 위해 존재하고 교육은 또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현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 학생들의 삶이 공부를 위해 희생되며, 공부의 이유는 오직 좋은 평가결과를 얻기 위함에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본말이 전도된 이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물론 힘든 일입니다. 학교는 사회 속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교육도 학교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잘못된 교육제도를 탓하며 교육의 변화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교사 한 사람의 노력으로 교육제도를 바꿀 순 없지만 학교를 바꿀 순 있습니다. 학교를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교실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를 바꿔야 합니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아이들을 보듬을 것이며, 부단한 자기연찬을 통해 수업과 학생평가에 관한 전문성을 길러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는 교사가 낡은 교육을 혁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누가 막겠습니까? 이런 교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학교도 바뀌고 또 교육도 사회도 바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교육의 진보는 혀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교사의 사회적 위상  (0) 2014.11.16
교육의 쓸모  (0) 2014.11.14
나와 너  (0) 2014.10.26
대화적 관계  (0) 2014.10.26
교육은 관계다  (0) 201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