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교육은 관계다

리틀윙 2014. 10. 9. 07:25

교육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만, 어떠한 식이든 교육은 결국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요약될 겁니다. 교사의 교육행위는 엄연한 노동입니다. 그런데 교육노동은 노동의 주체와 노동의 객체가 모두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수성을 갖습니다. , 교육은 노동대상(object of labor)이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행하는 다른 모든 노동과 구별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의 핵심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에 있다고 봅니다. 존 듀이가 교육은 삶이다라고 한다면, 저는 교육은 관계다라 하겠습니다. 물론, 관계가 교육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맺음에서 반드시 인간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모든 변화가 다 교육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피터스(R.S. Peters)가 말했듯이, 교육이라는 말 속에는 내재적으로 가치있는 변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이란 수식어는 불필요합니다. 그래서 간명하게 교육은 관계다라고 규정하겠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관계를 통해 교육적으로 성장해 갈 때, 이들이 학교에서 관계를 맺는 대상은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교사이고 다른 하나는 또래들입니다. 우선, 교사-학생 관계의 의미에 대해 제 초임시절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의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그 학교는 6학급의 작은 규모로서 교사 수도 여섯이 전부여서 개별 교사의 면면이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훤히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시절에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젊은 교사를 선호하고 나이 든 교사를 기피했습니다. 그 호불호의 판단에는 나름 선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직의 사회적 위상이나 처우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 시절에 선배교사들은 교직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존감이 빈곤했고 그에 따라 책무성도 희박했습니다. 지금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선배 교사도 그런 한 사람이었습니다. 환갑이 넘은 노회한 교사로서 이 분은 이를테면 겨울철에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와서 난롯불을 쬐다 교실로 들어가는데 10분 늦게 수업 들어가서 10분 일찍 나오곤 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이런 분은 교단에서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 시절엔 학부모 사이에 민원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고 또 이 분은 학교를 벗어나면 마을에서 권위 있는 어르신이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습니다. 우리 반의 한 여자 아이의 3학년 남동생이 그 선생님의 반이었는데, 이 집 학부모는 그 시절 먹고 살기 급급해 아이들 학교에 맡겨 놓고 신경을 안 쓰는 여느 시골 학부모와 달리 자녀교육에 애살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그 선생님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시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아이가 자기 담임선생님이 최고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환장하겠다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셨는데, 저도 같이 웃었지만 내심 아이의 그 말은 저의 정수리를 강타하며 어떤 성찰을 요청해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면 담임교사에 대해 알 건 다 아는 나이입니다. 그 선배교사는 내가 절대 닮고 싶지 않은 한심한 선생이었는데, 그 아이는 왜 자기 담임선생님이 모든 선생님 가운데 제일 좋다 하는 것일까요? 그 같은 이치는 지금 제가 말하는 관계론으로 설명이 됩니다. 아이의 대답은 우리 엄마가 왜 세상에서 제일 좋은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와 마찬가지로 우리 선생님이기 때문에많고 많은 선생님 가운데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이 끈끈한 유대감은 비단 어린 아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성숙한 어린 학생의 경우 그 맹목성이 절대적일 것이기에 초등교사에겐 교육자적 양심에 터한 엄격한 책무성과 자기규율 정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등교사는 이러한 교사-학생의 관계성을 잘 활용함으로써 교육의 효율성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사-학생 사이의 이 원초적 관계성이 교육이라는 수레가 굴러가는 근본 동력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교사를 따릅니다. 교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교사가 관심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교사가 가치를 품는 것에 아이들도 가치 의식을 지녀 갑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가까이 하게 하고 싶다면 교사가 책을 가까이 하면 됩니다. 교사가 인상 깊게 읽은 책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약간의 감동과 흥미를 곁들여 들려주면,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이들의 손에 그 책이 들려져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상혼에 찌든 천박한 대중가요에 탐닉하는 것이 염려스럽다면 가치 있는 음악을 들려주십시오. 그냥 음악만 들려주지 말고 음악에 얽힌 배경 지식과 함께 들려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전략으로, 교사가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로 이를테면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 어떤 추억이 떠오른다거나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고 하면 아이들은 그 음악에 빠져들 겁니다. 엄마와 함께 우연히 차의 라디오를 통해 그 음악을 듣게 되면 아이는 탄성을 내지르는데, “, 저거 무슨 음악이다라 하지 않고 , 저거 우리 선생님한테 배운 무슨 음악이다라고 합니다.

교사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나 음악 이야기에 아이들이 빠져드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 교육적 소재가 좋아서 그런 것이라거나 교사의 역량 문제가 아닌가?”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메커니즘은 객관적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동됩니다. 위의 예시, 독서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저희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투입-산출한 결과를 예로 든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제 집 아이에겐 이 방식이 잘 먹혀들지 않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의 부모이지 우리 아이의 선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관계성이란 측면으로 접근할 문제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잘 하게 됩니다. 교사의 특별한 역량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해 가는 것입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명제를 저는 교사의 자질과 역량만큼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교사의 키만큼 학생이 커가는 이러한 이치는 특히 예체능 교과의 교수-학습 과정에서 실감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이성보다는 감성, 논리보다는 직관으로 사물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악기 연주든 공예든 줄넘기든 학생들은 교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 기량을 터득해 갑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어린 아이에겐 불가능하다 싶은 기능을 아이들이 거뜬히 성취해내는 근본 동인은 교사-학생의 관계성에 있습니다. 교사의 시범을 통해 학생은 우선 저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동기부여를 받아 성취해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고츠키 학자들의 개념 공유된 활동 shared activity’으로 설명이 되는데, 공유된 활동은 비단 교사-학생뿐만 아니라 또래집단 내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또래들끼리의 관계에 비해 교사-학생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공유된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할 것이기 때문에 학생은 교사를 매개로 훨씬 높은 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학생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교사 대 학생의 관계 못지않게 학생 대 학생의 관계맺음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미성숙한 어린 학생에게 교사의 영향력은 절대적일 것이지만, 또래가 또래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아이의 연령이 낮을수록 지대합니다. 교사-학생 관계가 수직적인 반면 또래끼리의 관계맺음은 수평적인 면에서 이 두 관계맺음은 성격을 달리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결핍된 세 살 난 유아가 보육교사의 여타한 노력에도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다가 또래들과의 학교놀이에서 학생 역할을 수행할 때는 오랜 시간동안 주의집중을 잘 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보드로바&리옹. 같은 책, p.94). 두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에 대해 책에서는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저는 두 관계성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직적 관계 대 수평적 관계는 타율성 대 자율성과 조응할 것입니다. 교사의 지시는 외적으로 강제된 것이지만 또래끼리 수행하는 놀이에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교사의 지시에 대해 아이는 내키지 않으면 안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또래와의 관계에서 수행하지 않는 것은 곧 무능과 수치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책임 있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비단 유아의 경우뿐만 아니라 초등이나 중등 학생에게서도 이런 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교사 앞에선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가 또래끼리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강의식 수업보다는 학생들끼리 활발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모둠학습 형태를 자주 갖게 함으로써 학생 간의 공유된 활동을 활발히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고츠키 학자들에 의하면, 교사와의 공유된 활동보다 또래끼리의 공유된 활동에서 학습의 효과는 배가된다고 합니다.

교실 상황에서 또래끼리 배움을 주고받는 보편적인 경우는 학습역량이 유능한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이러한 튜터링(tutoring)을 예전엔 접장제라 일컫다가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 간 멘토-멘티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간의 튜터링에서 멘토 학생에게 일방적인 희생 또는 헌신을 강요하는 점에서 교사 입장에선 어떤 불편한 마음을 떨치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튜터링 과정에서 멘티보다 멘토가 득 보는 점이 훨씬 많습니다. 무릇 최고의 배움은 남을 가르칠 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쉽게 설명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멘토 학생은 멘티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앎을 새삼 돌아봄으로써 자기 지식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갑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잘 풀어내는 아이도 칠판에 문제를 풀게 한다면 친구들에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막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 순간 교사는 앎에도 수준이 있는데 최고 수준의 앎은 남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멘토-멘티 관계는 결코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득을 보거나 손해 보는 관계가 아니라는, 둘은 서로의 성장을 돕는 선량한 관계라는 점을 인식시켜줍니다.

또래끼리의 공유된 활동에서 학생의 성장이 일어나는 가장 의미 있는 국면은 비고츠키 학자들이 타인조절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애나 어른이나 인간은 자기 잘못보다는 남의 잘못을 먼저 발견합니다. 교실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남의 잘못을 교사에게 일러바치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고자질이라는 일컫는 이것을 비고츠키 학자들은 타인조절(other-regulation)’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이들은 타인조절이 자기조절로 향하는 첫 걸음이라 했습니다. , 고도의 정신 기능인 자기성찰 능력은 타인조절이라는 관문을 거쳐서만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른들이 타인조절을 해가는 경우에는 타산지석이니 반면교사니 하는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이의 타인조절에 대해서는 고자질이라는 오명을 씌웁니다. 그러나 교사는 아이들의 왕성한 타인조절 욕구를 자기조절의 계기로 활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 대신, 친구의 오류를 자기 오류의 거울로 삼게끔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아가 교사는 타인조절이 자기조절로 이어지는 이 절묘한 전화轉化의 이치를 아이들의 도덕성 발달뿐만 아니라 지적 발달에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지도를 할 때 칠판에 쓴 문장 가운데 틀린 것을 찾아내게 하는 식입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이 찾아내는 오류 가운데 상당수는 평소 자신이 잘못 구사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타인조절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올바른 맞춤법을 자기 역량으로 획득해 갈 수 있습니다.

 

저의 소박한 교육철학 관계의 교육론은 신영복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분의 책에 유명한 우생학자 프란시스 골튼의 흥미 있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시골장터에서 황소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놓고 몸무게를 맞추는 퀴즈가 열렸는데, 800명이 참가하여 각자가 생각한 소의 몸무게를 종이쪽지에 적어 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소의 몸무게를 정확히 알아맞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쪽지에 적힌 숫자들을 다 더해서 전체 참가자 수로 나눴더니 소의 몸무게와 정확히 일치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일화가 말해주는 교훈은 집단지성의 위력입니다. 아이들 가르치면서 이 집단지성 위력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영어수업 시간에 어려운 발음을 지도할 때나 음악시간에 리코더 지도를 할 때, 개별 학생에게 시켜보면 정확히 따라하는 아이가 잘 없는데 동시에 시켜보면 정확한 발음, 예쁜 음색의 소리를 냅니다. 음악용어로 앙상블이라 일컫는 이 집단조화의 묘미를 통해 학생들에게 개인의 능력은 미미할 지라도 그 능력의 총합은 위대하다는 의미에서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면 좋을 것입니다. 유념할 것은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각각 1의 역량을 지니고 있을 때 열 명이 모이면 그 총합은 10에 못 미칠 수도 있고 10을 훨씬 넘을 수도 있습니다. 교사라는 컨덕터가 교실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합주는 앙상블이 될 수도 있고 불협화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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