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이론과 실천

리틀윙 2014. 10. 4. 15:46

36 학급 규모의 도심지 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학년부장 교사가 학년 선생님들을 모아놓고 부장회의 결과를 전달합니다. 며칠 전에 어느 회사로부터 기증받아 학급 별로 하나씩 나눠준 배구공들을 모두 걷어 체육실로 보내라는 교장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 지시를 내리게 되었는지 까닭을 묻자, 저학년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교장실 앞마당에서 배구공을 축구공 삼아 놀이 하는 모습을 보신 교장선생님께서 모종의 문제의식을 품게 되신 거라 합니다. 편의상 이를 <에피소드 1>이라 하겠습니다.

<에피소드 2> 또한 직원협의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행정실장이 말하길, “어제 한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요즘 날씨가 더우니 아이들이 우유를 아침에 바로 먹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다고 합니다. 일견, 지극히 합당한 제안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교사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학교는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인데 우리 학교에선 2교시 마치고 1030분부터 11시까지 30분 동안 중간놀이 시간을 배치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게 합니다. 아이들이 실컷 뛰 놀고 교실로 들어오면 목도 마르고 배도 헛헛하기 마련인데, 목마름과 허기짐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요긴한 먹거리가 우유라는 게 우리 교사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께서는 학부모님의 건의와 교사들의 이견을 절충하여 냉장고에 우유를 보관했다가 2교시 마치고 먹이는 걸로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전교생 수가 60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이기에 가능한 처방이었습니다.

 

이 두 에피소드로부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입니다.

<에피소드 1>를 겪었을 당시 저는 지금보다 훨씬 혈기왕성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지시를 한 학교장이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배구공이 배구만을 위한 공이라면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에게 그 공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좁은 운동장은 늘 고학년 학생들의 차지여서 저학년 아이들은 교장실 부근의 시멘트 마당에서 뛰어 노는 상황에서 그 어린 아이들이 연약한 발로 배구공을 차대는 게 일탈행위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마음껏 뛰 놀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할 생각은 않고 그저 배구공으로 축구하면 안 된다거나 유리창이 깨질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놀이 활동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합당한 처방일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 교장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몇 번 근무했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습니다. 교감시절부터 그 분은 교사들에게 매우 호의적이고 자상한 후덕한 품성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딱 한 가지 단점을 빼곤 정말 괜찮은 분이었는데, 그 유일한 단점이 너무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철학이 빈곤한 점입니다. 사실, “사람 좋다는 말만큼 무의미한 말도 없습니다. 교육자가 사람이 좋으려면 교육적으로 좋아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교육 실천은 현명한 판단의 문제로 좁혀집니다. 교육자가 얼마나 교육적인 판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행복하게 해가며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는 겁니다. 그가 평교사라면 그가 맡은 한 학급 아이들의 행불행이, 학교장이라면 전교생의 행불행이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만약 그 교장선생님께서 아동 발달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을 갖고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을 약간이라도 하셨다면 그런 지시를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한편, <에피소드 2>에서 학부모님과 교사들의 생각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실천의 여부에 있습니다. 여름철에 우유가 상할 염려가 있다는 학부모님의 의견은 누가 봐도 합당한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중간놀이 마치고 우유를 마시면 더 좋은 점을 모르시는 겁니다. 이는 오직 교육실천을 하는 교사가 돼봐야지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학생 수가 많아서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저는 중간놀이 이후에 우유를 마시게 할 겁니다. 우리 교사들의 경험으로 학생들이 2교시 마치고 상한 우유를 마실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에피소드 1>에서 불상사가 생겨난 원인이 교육주체의 이론(철학)의 결핍 탓이라면, <에피소드 2>의 교사들이 학부모의 의견과 다른 자기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육실천을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교시절 영어공부 할 때 탐독했던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Theory is one thing and practice is another. "이론과 실제는 별개의 문제"라고 합니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론과 실제(실천)는 나란히 나아갑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교육실천을 할 수 있고, 실천하는 만큼 교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보육(保育)과 다릅니다. 올바른 교육은 아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헌신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동과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안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교직을 전문직이라 칭하는 것은 이런 뜻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념 속에 저장한 이론적인 무엇은 교육실천을 통해 보다 실물적인 모습으로 재정립됩니다. 대학교 교육학 수업이나 임용고시 공부할 때 이해가 잘 안 되던 것이 현장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뒤늦은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실천을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깨우쳐가는 과정에서 우리 현실에 맞지 않다 싶은 것들은 걸러질 겁니다. 이론과 실천이 서로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며 진정한 자기지식으로 정립되는 이 순간에 교사는 진정한 교육전문가로 한 걸음씩 성장해 갑니다.

이론과 실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모든 교육담론은 교육현실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론은 교육학교수, 교육실천은 학교교사의 몫으로 이분화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난센스입니다. 자연과학계에선 어떤 가설이 이론으로 정립되기 위해 반드시 '실험'을 거칩니다. 실험실을 떠난 과학자나 과학이론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육 영역에서 실험실은 어디일까요? 두 말할 것도 없이 학교현장입니다. 수술실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의대교수를 생각할 수 없듯이, 학교현장과 유리된 교육학자 또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분들이 우리 사회의 교육담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현장에 유포하여 현장교사들의 공분을 싸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론과 실천, 교육담론과 교육실제의 괴리가 좁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육학자들이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고 반대로 현장교사들은 교육이론을 폭넓게 섭렵해가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론을 학자들의 몫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이론을 가까이 하여 전문성을 신장해갑시다. 교육실천가인 교사들이 교육이론을 가까이 하면 대학교수보다 더 유능한 교육이론가가 될 수 있습니다. 각종 교사 연수에서 연수생들로부터 높은 만족도를 얻는 강사들은 이론적 깊이를 갖춘 현장교사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합니다.

 

끝으로, 이론-실천과 관련하여 교육운동진영(전교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릇된 경향성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 운동진영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이 실천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이론적인 무엇을 관념적인 것으로 경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관념적이며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 딱 그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진보적인 사상가 가운데 그 누구도 이론의 가치를 폄하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론이 결여된 맹목적 실천의 위험성을 경고했을 뿐이죠. 레닌은 혁명이론 없는 혁명실천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사회의 진보를 소망하는 분들은 실천이란 말보다 프락시스라는 운치있는 표현을 선호할 겁니다. 실천이란 뜻의 영단어 ‘practice’의 어원인 그리스어 ‘praxis’는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입니다만, 한국사회 운동진영에선 아마도 칠팔십년대 활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Freire, P.)의 개념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프레이리에게 프락시스는 행동주의(activism)와는 거리가 멉니다. 프락시스란 간단히 성찰(reflection)이 수반된 행위(action)”로 정의됩니다. 어떤 성찰이 행위로 이어지고 그 행위를 다시 성찰하면서 어떤 오류를 수정보완한 뒤 새로운 행위를 감행해가는 일련의 과정, 즉 성찰-실천-재성찰-재실천의 부단한 과정이 프락시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감한 행위만 있고 진지한 성찰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 사회 운동진영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칠팔십년대에 비해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운동방식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프락시스의 양축 성찰행위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결과 현재 우리 사회 진보진영은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실천,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실천은 실천이 아닙니다. 현실과 유리된 실천은 아무 것도 실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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